#일리아스 #호메로스 #책 #숲
기원전 5세기경 호메로스가 지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구입한 나는 <오뒷세이아>를 먼저 읽었다. 뒤에 <일리아스>를 읽고서야 <오뒷세이아>가 <일리아스>의 배경이 되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십 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자 아가멤논이 이끄는 아카이오이족의 동맹으로 참전한 오뒷세우스는 아주 젊은 나이에 어린 아들을 고향에 남겨두고 전쟁터로 향했다.
아마도 그는 아름다운 아내(페넬로페)와 어린 아들(텔레마코스)을 남겨두고 전쟁에 나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자신이 헬레네의 구혼 당시 걸었던 맹약(헬레네의 남편이 되는 자의 권리를 지켜주기로 한)에 제 발등을 찧게 된 상황이 되었다.
<일리아스>에서 청춘을 빛내며 전장을 누볐던 오뒷세우스는 십 년 동안의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십 년에 걸쳐 귀향길에 올랐고 그 험난한 귀향의 과정을 다룬 책이 바로 <오뒷세이아>이다.
<오뒷세이아>를 먼저 읽은 이유로 나는 <오뒷세이아>에서 오뒷세우스가 하데스의 지하세계에 가서 만나게 되는 망자들(아가멤논 등)이 <일리아스>에서 살아서 영광스러운 지위를 누리며 빛나는 무훈을 뽐내는 장면을 읽을 때 기분이 참 이상했다.
[그러고 나서 신성한 페르세포네가 여인들의 혼백을
사방으로 흩어버리자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의 혼백이 괴로워하며 다가왔소.
~아가멤논은 검은 피를 마시자 금세 나를 알아보았소.
그는 소리 내어 울며 눈물을 뚝뚝 흘렸고
내게 닿기를 열망하며 두 손을 내밀었소.
하지만 그에게서 전에 그의 나긋나긋한 사지에
넘치던 힘과 기운을 더는 볼 수가 없었소. ] <오뒷세이아> p281~282
아카이오이족을 지휘하는 왕으로서 영광을 누리며 전장을 누비던 아가멤논이 죽음 이후에는 아무런 힘도 없는 망자가 되어 있는 모습에서 인간이 살면서 좇는 모든 것들이 실제로 허상인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름다운 헬레네와 결혼하고 싶은 아카이오이족의 영웅들은 많았지만 그들이 모두 청혼을 하게 될 경우 생길 수 있는 충돌을 막기 위해 헬레네에게 선택권을 주고 그녀가 선택한 남자의 권리를 지켜주자고 제안을 한 오뒷세우스의 맹약에 의해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영웅들은 더 많은 영광과 더 많은 전리품과 더 많은 노예를 얻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필멸의 인간이라는 운명을 맞아 모두 어떠한 방식으로든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그들이 네 번째로 샘물가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가 황금 저울을 펼쳐 들고 그 안에
사람을 길게 뉘는 죽음의 운명 두 개를 올려놓으니, 하나는
아킬레우스의 것이고 하나는 말을 길들이는 헥토르의 것이었다.
제우스가 저울대 중간을 잡고 저울질하자 헥토르의 운명의 날이 기울어져
하데스의 집으로 떨어졌다. ] p 629
그런데 <일리아스>에서 다루는 영웅들의 죽음은 운명에 의해 죽음으로써 그 끝이 정해져 있지만 그 과정에 다수의 신들의 의사가 개입했다는 점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생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시작과 끝은 정해져 있지만 그 과정을 호메로스는 그 운명의 큰 그림을 지켜보는 전지적 시점으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예부터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다. 하나의 행동이 원인이 돼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 사고들처럼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이야기에는 원인이 있다. 그 시작은 바다의 여신 테티스가 아버지보다 강력한 아들을 낳으리라는 여신 테미스의 예언에서부터 출발했다. 내심 테티스와 결혼하고 싶었던 제우스와 포세이돈은 예언을 듣자마자 앗 뜨거라(왜냐면 바로 그 자신들이 아버지 크로노스를 꺾고 지금의 자리를 차지했으므로)하고 테티스를 인간 남자 펠레우스와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런데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여신 에리스가 앙심을 품고 잔칫상에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새긴 황금 사과를 던져 놓았다.
그 황금사과를 놓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서로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를 인간 중 가장 미남인 파리스에게 묻기로 결정했다. 헤라는 자신에게 사과를 주면 ‘아시아의 통치권’을 주겠다고 했고 아테나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주었고 아프로디테는 파리스에게 이미 메넬라오스의 아내가 된 헬레네를 그의 아내로 빼앗아 주었다.
하루아침에 신의 명령이라며 아내(헬레네)를 빼앗긴 메넬라오스(아가멤논의 동생)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형인 아가멤논 왕에게 아내를 되찾아올 것을 청했고 헬레네가 선택한 남자의 권리를 지켜주기로 약속한 아카이오이족의 영웅들은 맹약에 의해 자동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바야흐로 트로이 전쟁의 서막이 올랐으니 여기에서 문제는 트로이 전쟁 중 아킬레우스가 얻은 전리품 중의 하나인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를 아가멤논이 뺏어가면서 또 사건이 발발했다는 점이다. 남의 멀쩡한 결혼한 유부녀를 하루아침에 다른 남자의 아내로 준 신(아프로디테) 때문에 발발한 전쟁에서 동맹군의 장수가 좋아하는 여자(사실 이 여자도 유부녀였는데 남편이고 형제고 전부 아킬레우스가 다 죽여서 전리품이 되었다는)를 왕이라는 신분을 앞세워 빼앗아 갔으니 가만있을 아킬레우스가 아니었다
왜냐면 아킬레우스의 엄마가 보통 인간이 아닌 여신 테티스였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아킬레우스가 평범하게 오래 사는 삶 대신 굵고 짧게 사는 단명의 삶을 택해서 속상한 테티스였는데 그렇게 맘이 짠하게 아픈 아들이 울면서 엄마에게 여자 친구를 뺏겼다고 읍소를 했으니 엄마가 가만있을 리가 만무했다. 테티스는 그 즉시 올림포스로 날아가 제우스의 무릎을 잡고 아들의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을 간청했으니 그때부터 제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개입하려는 신들의 행동(헤라와 아테나)을 막고 트로이에게 승전의 영광을 극대치까지 맛보게 했다가 아카이오이족이 절체절명에 처했을 때 아킬레우스가 등장해서 단 번에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도록 극본을 짜 놓았다.
[“아버지 제우스여! 내 일찍이 여러 신들 중에서 말이나 행동으로
그대를 도운 적이 있다면 내 소원을 이뤄주시어 내 아들의
명예를 높여주소서. 그 애는 모든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요절할
운명을 타고났나이다. 그럼에도 지금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이
그 애들 모욕하여 그 애의 명예의 선물을 몸소 빼앗아 가졌나이다.
그러니 그대가 그 애의 명예를 높여주소서, 조언자이신 올림포스의
제우스여! 아카이오이족이 그 애를 존중하고 그 애에게 전보다 큰
경의를 표할 때까지 부디 트로이아인들에게 승리를 내리소서.” ] p50~51
바로 그 제우스가 짠 극본에 주연 아킬레우스가 활약한 이야기가 <일리아스> 되시겠다. 기원전 5세기에 쓰인 이야기가 이렇게나 흥미진진할 수 있다니 읽는 내내 감탄을 연발하게 되었다.
무적의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과 여자 문제로 다툰 이후로 그는 자신의 함선에 틀어박혀 동맹군이 죽고 사는 문제에 귀를 닫아 버렸다. 이후 아가멤논이 브리세이스를 돌려주고 자신의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트로이의 왕 헥토르에 의해 전사한 이후에 헥토르와 일 대 일로 싸워 그를 죽이기까지의 이야기가 <일리아스>에 담겨 있다.
<일리아스>에서 일 대 일로 겨루기 전 영웅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뉘 집 자식이며 자기의 지위와 행적 등)인지를 참으로 소상하게도 얘기한다. 그리고 둘 모두 서로를 향해 창을 던진다. 그러다 한 명이 창에 맞아 죽으면 앞서 읊었던 그 모든 것(사회적 지위와 명성)이 블라블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걸 보면서 나는 기원전 5세기의 삶이나 지금의 삶이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변하지 않는 정형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