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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호밀밭의파수꾼 #J.D.샐린저 #민음사

by 묭롶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 p 287~288



<호밀밭의 파수꾼>에는 세 가지 형태의 죽음이 등장한다. 작중인물 홀든은 동생 앨리의 죽음을 통해 부조리한 세상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후 급우인 제임스 캐슬의 죽음을 통해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는 방법이 죽음뿐인가라는 자문을 하게 되고 속물들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홀든의 동생 앨리의 죽음}


아마도 동생 앨리가 죽지 않았다면 홀든은 형인 D.B처럼 문학을 하다가 세상의 흐름에 맞춰 영화 시나리오를 쓰거나 아버지처럼 고문 변호사가 되는 등 일반적인 기준에서 성공한 상류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패션 센스가 있는 엄마가 골라준 옷을 입고 아버지가 보내주는 명문학교를 다니면서 자신과 동류인 부류와 어울려서 공부를 하고 테니스나 골프로 여가를 보내고 샐리 같은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



[그 애가 죽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내가 그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래도 좋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죽었다고 좋아하던 것까지 그만둘 수는 없는 거 아니야?

더군다나 우리가 알고 있는 살아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천 배나 좋은 사람이라면 더욱 말이야.. ] p285


하지만 앨리의 죽음 이후 그는 앨리가 없는 일상을 그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가 없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일상을 살아가는 가족들 속에서 그는 이방인과 같은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앨리와 여동생 피비와 함께 즐겁게 보았던 영화들도 이제는 그저 연기자들이 연기가 아닌 척 꾸며서 하는 연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무언가 인 척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연기자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들의 포즈에서 풍겨 나오는 속물근성에 홀든은 구토를 느낀다. 흡사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자신은 아랍인을 살해했을 뿐인데 살인죄로 기소된 자신에게 자꾸 엄마의 장례식에서의 태도를 문제 삼는 검찰과 배심원들에게 뫼르소가 느끼는 부조리처럼 현실이라는 끈적이는 부조리의 푸딩에 빠진 홀든은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그 속으로 침몰한다.




{엘크톤 힐즈(학교)에서 급우였던 제임스 캐슬의 죽음}


[ 어니는 몸집이 뚱뚱한 흑인으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상대가 상류층이나 명사가 아니면 상대도 하지 않는 지독한 속물이다.

그렇지만 피아노 연주만큼은 끝내준다. 정말 기분 나쁠 정도로 잘 친다.

~난 그의 연주를 좋아하긴 하지만, 때로는 피아노를 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왜냐하면, 상류층이 아니면 상대도 하지 않는 그 인간처럼 음악도

그렇게 들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 P138~139


앨리의 죽음 이후 사람들의 속물근성을 예민하게 감지하게 된 홀든은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무언가 인척’하는 포즈를 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포즈에 대해 직접적으로 ‘거만하기 짝이 없는 놈’(필 스태빌)이라고 말하는 제임스 캐슬이라는 학생에게 그는 유일하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거만하기 짝이 없는 놈의 패거리가 제임스 캐슬을 찾아와 폭행을 하며 거만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는 말을 취소할 것을 종용하자 제임스는 이를 끝까지 거부한 채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자신이 빌려준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채 돌계단 위에 처참하게 죽어 있는 제임스를 보면서 홀든은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는 방법이 죽음뿐인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홀든 콜필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자각}


[널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넌 지금 일말의 가치도 없는 일로

고귀한 죽음을 감수하려는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야 ] p311


너무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동생 앨리의 죽음을 통해 부조리한 세상에 눈뜨게 된 홀든은 제임스 캐슬이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기 위해 집단 폭행 끝에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죽음을 선택하고 그를 죽게 만든 학생들은 겨우 퇴학처분으로 끝나는 것을 보면서 부조리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그는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하며 펜시 학교에서 제적당해서 퇴학을 당한 후 집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정처 없이 방황을 하게 된다. 같은 방을 쓰는 스트라드레이터의 경고에도 욕설을 멈추지 않아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은 채 학교를 나선 그는 어쩌다 들어간 숙박업소에서 포주에게도 얻어맞고 나이를 속인 채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시고 비를 맞는 등 자신이 죽음에 대해 가진 두려움에 맞서기라도 하 듯 자신의 몸을 죽음 근처에 다다를 때까지 혹사시킨다.




{호밀밭의 파수꾼}


어쩌면 이 작품에서 파수꾼을 기다리는 꼬마는 바로 홀든 그 자신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파수꾼 역할을

맡으려 하지 않는 지옥 같은 세상에서 절벽을 향해 질주하는 아이와 같은 그 자신을 누군가 붙들어 주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어른들이 아닌 그의 어린 여동생 피비였다. 서부로 무전여행을 떠나겠다는 홀든을 따라가겠다고 가방을 싸온 동생을 본 그는 떠나지 못한 채 다시 일상으로의 복귀를 위해 치료를 받게 된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나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내 아버지는 마흔의 나이에 당좌수표를 부도내고 그 수습이 두려워서 목숨을 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빚도 문제였지만 나는 아버지가 자살을 했기 때문에 나도 분명히 자살하고 말 거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왜냐면 아버지에게 죽음이 탈출구였듯이 내게도 분명히 도피처가 되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한가닥 위로가 될 정도로 내 생활을 궁핍했고 나는 많이 아팠다.

아마 그 시절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내게 큰 위로가 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존엄을 말하기 위해 책을 썼던 로맹 가리처럼 누군가에게 파수꾼이 되어 주는 진짜 인간이 되길 바랐던 마음이 J.D. 샐린저에게 이 책을 쓰게 만들지 않았을까. 읽는 내내 너무 슬펐지만 나는 이 아픈 글을 읽으며 누구나 약자를 위한 파수꾼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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