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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에 출간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절망>에는 두 명의 나(‘나‘ 와 나 자신을 놓고 소설을 쓰는 ‘작가 게르만’)가 등장한다. 소설을 쓰는 게르만은 자신이 천재적인 예술가이며 일반인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는 초콜릿 사업 차 들린 프라하의 외곽에서 우연히 만난 부랑자 펠릭스를 만나 완전범죄를 자신하며 보험사기를 계획하여 펠릭스를 살해했지만 범죄가 발각되어 도주하는 도피길에 자신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된다.
자신을 천재적인 예술가라고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는 게르만은 자신이 쓰는 소설 속 암시를 통해 자신의 실체를 스스로 독자 앞에 폭로한다. 어찌 보면 李箱의
시 <오감도 제1호>의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처럼 게르만은 그 스스로 자신의 실체를 알고 있기에 그 스스로 무섭고도 무서워하는 공포와 혼란에 직면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감도 제1호>에서 막힌 골목도 뚫린 골목도 상관없이 도로를 질주해도 좋고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다는 ‘아해’는 작품 속 ‘게르만’과 닮아 있다. 그런 이유로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자신의 1955년 출간 작품인 <롤리타> 속의 작중 인물 험버트와 게르만이 닮아 있지만 험버트에게는 일 년에 한 번 땅거미가 질 무렵 거닐도록 허락된 낙원으로 가는 푸른 오솔길이 있는 반면 게르만은 보석금을 얼마를 내든 결코 잠시라도 지옥에서 풀려날 수 없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때로 꿈이 그렇다. 꿈속에서는 꽤 멋지게 달변을 늘어놓지만,
눈떠서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눌한 허튼소리이다. ] p122
꿈은 이미지의 덩어리이다. 꿈에도 사건과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그건 서로 연결되지 않는 퍼즐 조각처럼 단편적이다. 하지만 꿈을 꿀 때 우리는 사건의 개연성이나 당위성을 판단할 수 없이 그냥 보이는 이미지를 사실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절망>을 읽으며 이 책이 게르만이 꾸고 있는 꿈을 옮겨 놓은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그 사람은 특히 자고 있을 때, 이목구비의 움직임이 없을 때,
내 얼굴을, 내 마스크를, 티 없이 깨끗한 내 시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시체라고 말하는 이유는 오직 내 생각을 극도로 선명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 p23
수증기가 뿌옇게 서린 목욕탕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잠깐 눈에 들어온 사물들처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문장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잠시 암시하지만 이내 다음 문장을 통해 우리에게 잠시 동안 열렸던 시야를 다시 수증기로 덮어버린다. 그런 이유로 독자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게르만에 대한 판단을 연결고리를 통해 진행시키지 못하고 계속 독자의 판단은 모호함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 모든 건 거짓 존재, 사악한 꿈이다.
그리고 나는 프라하 근교의 어느 풀밭에서 잠을 깰 것이다. ] p235
저자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싫어했다고 하지만 내게 이 작품은 게르만이 꾼 꿈을 소설로 옮겨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펠릭스를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말하고 아르달리온이 두 개의 복숭아를 그린 정물화를 두 송이의 장미와 담배 파이프로 인식하는 게르만의 상태는 현실적 판단력이 부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펠릭스를 기다리며 게르만이 보는 뱀에 관한 환상도 결국은 그가 꿈을 꾸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전 생애에 관한 꿈을 꾼 우리나라 고전 <구운몽>처럼 게르만은 보험사기를 꾸미는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어떤 면에선 꿈을 꿀 때 우리의 자유의지가 개입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는 눈뜨고 꿈을 꾸고 있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작품의 소설적 배경이 작중 인물의 현실인지 꿈인지는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1898년 출간된 헨리 조임스의 <나사의 회전>이 실제와 환상 그리고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그전까지 보지 못했던 길을 보여줬던 것처럼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李箱이 연재했던 <오감도 시편> 중 <오감도 제1편>과 같은 분리된 자아와 이를 인식하는 나로 인한 혼란을 이 작품이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러한 새로운 문학적 시도를 통해 인간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을 조금은 더 높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