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콘래드 #암흑의핵심 #책 #소설 #민음사
요즘 들어 장수가 많은 책들은 쉽게 읽히는 반면 채 2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책을 읽을 때면 시간이 평소의 배가 들곤 했다. 페터 한트케의 <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가 그랬고 또 이번에 읽은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이 그러했다. 이 책들에 대한 난독의 원인을 문장이 갖는 애매모호함에서 찾을 수 있겠다. “그리하여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책이나 눈에 그려지듯 결론을 짓는 문장들을 읽을 때 나는 그저 읽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해석에 따라 가부가 뒤바뀔 수 있는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면 나는 미노사우로스의 미궁에 빠진 것처럼 문장을 읽는 내내 내 생각이 문장의 단락마다 끼어들어 그 문장의 미로 속에서 계속 헤매게 되는 것이다.
여타의 소설이 완성된 레고 작품과 같다면 우리는 완성된 부품을 빼내서 그것에 수정을 가할 수가 없다. 작가가 문장 속에 같이 넣어 직조해 놓은 무늬를 보면 그뿐이다. 하지만 도저히 마침표를 찍을 수가 없이 계속되는 …………..으로 이어지는 문장을 만날 때면 이 빈칸에 과연 무엇을 넣어야 하는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 나는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사랑스러운 어린아이들을 보호하고
지켜주기 위해 그곳에 있었으며, ~이들에게 헌신하려는 내 마음에
길고 지속적인 아픔이 되었다.
우리는 실로 세상과 단절되어 함께 위험 속에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아이들에겐 나밖에 없었고, 나에겐 그들만이 전부였다.
간단히 말해 그건 절호의 기회였고,
~나는 보호막이 되어 아이들 앞에 서야 하며.
~나는 긴장감을 억누르고 흥분을 감추며 아이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 <나사의 회전> p68
=> 나는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이 가정교사가 너무 무섭다.
영화 <디아더스>의 원작인 헨리 조임스의 작품 <나사의 회전>의 결론을 두고 아직까지 읽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분분한 경우처럼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어떠한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 이에 따른 해석은 주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제를 풀다가 막히면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바로 맨 뒷장의 정답을 찾던 평소의 습관이 튀어나와 이번에도 이 책을 읽는데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1899년 출간된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을 읽고 나는 1898년 출간된 헨리 조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떠올리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이 작품들은 심리소설의 효시로 이후 문학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낳게 되는 문장의 모호성과 작중 인물이 자신이 겪거나 들었던 이야기를 타인에게 들려주는 방식을 택한다는 점에서도 닮은꼴이다. 그러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으로 인해 이 두 작품은 지금까지도 많은 영화와 연극의 모티브로 활용되고 있다.
<암흑의 핵심>은 벨기에의 식민 회사에 고용된 말로라는 선장이 식민 지령인 콩고에서 근무 중인 주재원 커츠를 데려오라는 임무를 받고 콩고에 다녀온 이후 이를 주변 사람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식민지 회사 내에서 커츠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다른 주재원들과는 달리 신출귀몰한 방식으로 엄청난 양의 상아를 공급해오던 커츠와 본사와의 연락이 두절되자 회사는 선장 말로를 고용하여 커츠를 데려올 것을 요구했다. 이에 커츠를 찾아 콩고에 온 말로는 야만적인 상태의 콩고의 생활에 일차적인 문화적 충격을 받았고 식민지에 주재하는 백인들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성에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는 밀림의 상류에 위치한 커츠를 만나기 위해 난파된 배를 수리해서 밀림을 거슬러 올라가던 도중에 야만인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커츠를 만난 후 그 공격이 커츠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커츠가 최초에 야만인 개도라는 커다란 이념을 갖고 콩고에 도착했지만 상아 수집이라는 목적을 위해 그 이념을 종교처럼 사용함으로써 신적인 존재로 원주민들에게 군림하던 과정에서 영혼이 부패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제국주의의 이념에 의한 도구로서 일했던 말로는 커츠를 만난 이후 자신이 그동안 제국주의라는 환한 빛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밀림과 커츠로 상징되는 암흑을 통해 발견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삶을 각성하게 된다.
[ 옮길 수 없고말고. 그걸 옮기기는 불가능해.
우리의 일생에서 그 어떤 특정한 시기의 삶에 대한 지각을 옮길 수는 없다고.
그 삶의 진실, 그 의미 그리고 그 오묘하고 꿰뚫는 본질을 구성하는 것 말이네. ] p62
<암흑의 핵심>은 작가인 조셉 콘래드의 콩고 기행을 기초로 쓰인 자전적인 소설이다. 작중 인물 커츠를 만난 말로의 각성처럼 실제로 조셉 콘래드는 채 육 개월이 되지 않는 콩고 경험을 통해 이질과 말라리아로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 체험을 통해 직업인으로서의 뱃사람 대신 작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 인생이라는 건 우스운 것, 어떤 부질없는 목적을 위해
무자비한 논리를 불가사의하게 배열해 놓은 게 인생이라구.
우리가 인생에서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우리 자아에 대한
약간의 앎이지.
그런데 그 앎은 너무 늦게 찾아와서 결국은 지울 수 없는
회한(悔恨)이나 거두어들이게 되는 거야.
~나는 커츠의 눈초리가 지닌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어..
~그는 자신의 삶을 요약한 후 <무서워라!>라는 말로
판정을 내렸던 것일세. ] p159~160
언젠가 고대 인디언 중 한 부족이 자신들의 수장으로 그 부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까지 다녀온 사람을 지도자로 삼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암흑의 핵심>에서 작중 인물 말로가 콩고의 밀림 깊숙한 곳까지 커츠를 찾아가서 알게 된 진실과 실존인물인 작가 조셉 콘래드가 콩고 기행을 통해 얻게 된 깨달음은 같은 것이다.
그 두 인물은 보통 사람들이 평생 동안 겪거나 보지 못하는 인간의 본질의 핵심에 다가섰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작중 인물 말로는 야만 상태의 콩고 원주민을 보면서 과연 인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다음엔 과연 문명이 야만 상태의 원시부족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되묻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커츠는 원주민을 개 도하겠다는 큰 목적을 지닌 채 원주민과 접촉하게 되었다. 하지만 식민지 회사의 이윤(상아)을 추구한다는 목적과 원주민 개도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던 커츠는 그 과정에서 원주민들에게 신처럼 군림하는 하나의 종교(惡神)가 되고자 문명을 버리고 야만성을 스스로 선택했다.
[ ~ 그 짐승 일일랑 잊어버리기로 해
~그리고 그 짐승 얘긴데, 우리가 멧돼지를 잡거든 얼마를
그 짐승에게 넘겨주기로 해.
그러면 아마 그건 우리에게 귀찮게 굴지 않을 거야. ] <파리대왕> p199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란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 <파리대왕> p 214
흡사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에서 비행기 사고로 외딴섬에 조난당한 소년들이 뿔피리와 안경으로 상징되는 민주적인 방식의 생존 방식을 포기하고 스스로 야만성을 택했던 경우처럼 <암흑의 핵심>에서 커츠는 자신만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데리러 온 문명세계의 동류를 공격했던 것이다. 그 과정을 모두 목도한 말로가 이제 문명은 인간의 본래적인 야만성(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을 가리기 위한 위장막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이런 몸짓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내가 본 다른 한 여인과
닮은 데가 있었어.
그 여인 또한 비극적인 인물로서 아무 효력도 없는 부적으로 몸을 장식한 채
그 지옥 같은 강물, 암흑의 세계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의 반짝이는
위로 헐벗은 갈색의 팔을 펴고 있었지. ] p173
스스로 문명을 포기함으로써 야만인들의 신이 되고자 했던 커츠가 죽음에 직면해서 내뱉은 마지막 말 [무서워라! 무서워라!] p158는 실은 밀림의 깊은 상류에서 시작된 검은 강물처럼 문명으로 감춰진 인간의 본질이 ‘야만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공포의 단말마이다. 이 모든 것을 겪은 말로가 커츠의 약혼녀의 손짓에서 커츠가 신으로 군림했던 야만의 부족 여인이 저주의 주술을 읊으며 했던 손짓이 닮아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야만과 문명이 종이 한 장 차이임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깨달음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언제든 또 다른 커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두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