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그어놓은 선(線)을 넘은 남자의 이야기.

#오스카와일드작품선#책 #민음사 #문학

by 묭롶

나는 공포영화를 좋아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여곡성>을 시작으로 중학교 시절 <이블데드> 및 <나이트메어>, <엑소시스트> 등을 거쳐 매년 개봉하는 공포영화는 거의 대부분을 챙겨 보았다. 장르로서의 공포영화를 좋아하지만 공포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갈증을 느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공포를 보여줬던 <기담>에서 소름 끼치게 분장한 엄마 귀신은 공포에 질린 소녀 옆에서 혼자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만 되뇌다 그 이상의 무엇도 하지 않은 채 장면이 전환되고 마는데 나는 15금을 염두에 둔 공포영화의 제약이 언제나 안타까웠다. 나는 언제나 영화제작자와 사회가 약속한 15금 딱 거기까지에서 멈춰 있는 길의 다음 여정이 궁금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선>을 읽으며 나는 그가 세상이 정한 선(線)을 넘지 않았다면 앙드레 지드 만큼 오래 살면서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은 다만 가족들과 조금 더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지하에서 서식해야 할 바퀴벌레가 나의 거처에서 발견되었다는 죄로 때려죽임을 당하는 경우처럼 딸 기정은 죽고 자신은 지하에 숨어 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앙드레 지드가 자신의 욕망(동성애적 성향)을 프랑스 문단의 그늘 아래에서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해결했던 반면 오스카 와일드는 공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자신의 취향(나는 지금도 그가 동성애자였는지 단순히 나르시스적 매혹에 사로잡혔던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는다)을 법정에 세웠을 때 스스로 자신을 적극적으로 항변하지 않았다. “나는 더글러스 경을 문학적 영감의 원천(뮤즈)으로 여겼을 뿐 그를 이성으로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항변했다면 어쩌면 그는 모든 것(자식들과 재산)을 빼앗긴 채 2년의 강제노역형에 처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는 사회라는 울타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사회가 그어 놓은 선을 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간혹 예술이라는 방식을 통해 작품에 날개를 달아 그 금기의 선을 넘는 경우가 드물게 있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보호라는 이름의 울타리 아닌 담장 속에 갇힌 채 보통이라고 스스로 믿는 삶 속에서 도태된다.



나는 그의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을 읽고서야 2년여의 강제 노역형으로 인해 심신이 망가진 오스카 와일드가 앙드레 지드에게 했던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저기 말이에요, 친구, 내게 약속을 하나 해줘야 할 것 같소.

[지상의 양식], 훌륭해요……아주 훌륭해요……

하지만 내게 약속해주시오.

앞으로는 나라는 말은 결코 쓰지 않겠다고.”

내가 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자 그는 다시 말했다.

“예술에는 말이죠, 1인칭이란 없습니다.” [심연으로부터 ] p276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글을 통해 세상이 보여주지 않은 이면의 ‘아이러니’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작중 인물 ‘뫼르소’가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사회, 도덕적 관습의 잣대로 처벌하는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스스로 사형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오스카 와일드의 글은 ‘아이러니’한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장치이다.


세상의 부조리를 글의 법정에 세운 그에게 피고는 당시의 사회이며 이를 고발하는 오스카 와일드는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닌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원고인 보통사람을 대표하는 자격을 갖는다. 그는 글이 지닌 인류적인 책무를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이유로 글이라는 예술이 결코 1인칭이 될 수 없음을 앙드레 지드에게 피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선 속 인물들은 저마다 사회의 부조리를 ‘아이러니’라는 장치를 통해 고발하는 대표의 성격을 지닌다. 평생을 궁궐의 담장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다 죽어 ‘행복한 왕자’라는 동상으로 세워졌지만 사는 동안 궁궐에서 볼 수 없었던 비참한 서민들의 삶에 눈물 흘리는 왕자는 동상의 이름처럼 ‘행복한 왕자’가 아니다.

‘행복한 왕자’의 부탁을 들어 동상에 박힌 보석과 금박을 벗겨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제비는 일반적인 삶에서 발견하기 힘든 오지랖 넓은 의인이다. 신조차 버린 듯한 이 세상에서 과연 누가 타인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오스카 와일드는 동화라는 형식을 빌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더불어 그는 기만으로 가득한 사회 권력층이 실제 어떠한 사람들인지를 소설 속 인물들의 아이러니한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부와 권력을 지녔고 고등교육을 받아 교양인으로 자처하는 아서 새빌 경이 손금을 보는 수상가의 예언에 사로잡혀 자신의 앞날을 보장받기 위해 살인을 모색하는 <아서 새빌 경의 범죄>는 당시 사회 지도층의 실제 민낯을 드러낸다.






[ ~그들은 비천한 물질주의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어서

감각적 현상의 상징적 가치를 알아볼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캔터빌의 유령은 그다음 삼 주 동안 토요일마다 평소처럼

자정과 3시 사이에 복도를 가로질렀지만, 누가 듣거나 보지 못하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다. ] p106





<캔터빌의 유령>을 통해서 그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본질인 유령조차도 몸을 사리게 만들 정도(놀라게 할 목적으로 미국인들 앞에 나타났는데 유령에게 베개를 던지며 잠 좀 자자고 외치는)로 거침없이 나아가는 냉혹한 물질만능 자본주의(미국으로 상징)의 본래 성격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에는 오스카 와일드가 쓴 희곡 [살로메]와 [진지해지는 것의 중요성]도 실려 있는데 [살로메]를 통해서는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자(요나칸을 가지려는 살로메 공주)의 탐욕과 끝내 그것을 가진 자(형수를 취한 헤롯왕)가 가지려는 자에 대해 갖는 혐오가 불러일으키는 비극을 보여주며 [진지해지는 것의 중요성]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미(이름과 지위)를 부여하는 사회 지도층의 허장성세를 실제로 시연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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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선을 읽으며 시, 소설, 희곡, 논평 등 오스카 와일드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알베르 카뮈가 부조리를 그려내기 위해 [이방인]을 썼고 이후 저항을 표현해내는 방법으로 [시지프 신화]와 [페스트]를 썼던 것처럼 오스카 와일드에게도 장르는 세상이 그어 놓은 선을 넘어가기 위한 종이비행기이고 연(鳶)이며 또 비행기였을 것이다. 특히 내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동화 [행복한 왕자]의 원작자가 오스카 와일드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발견한 나는 그가 이 책을 읽는 어린이들에게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해 달아 놓은 날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신은 끝내 세상의 단죄를 맞고 요절하고 말았지만 ‘나’가 아닌 ‘우리’가 더 행복해지는 세상을 꿈꿨던 그의 마음을 작품을 통해 발견한 나는 그가 죽고 난 이후에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는 이유를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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