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18
2018.12
어떤 대사들은 마음으로 다가오고, 어떤 대사들은 머릿속에 머무르게 된다. 영화나 소설의 이야기 속에도 내 발자국이 찍혀 있을 때, 영화 속 대화들은 종종 마음으로 다가온다. 위로받은 슬픔이 또 다른 행복이 되었다는 [인사이드 아웃]의 이야기와 “우리는 영혼이 다른 과인가 봐요”라고 말하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같이. 마음에는 닿지 못하고 머릿속에 머무르는 대사들은 아직 겪어보지 못했지만 너무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단어들이다. 너무도 결연한 표정으로 “I am not afraid” 하고 외치던 [캐롤]의 테레즈처럼. 나는 아직 두렵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사랑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녀처럼 단호한 어조로 사랑을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로맨틱할지 때때로 생각하고는 한다.
그렇게 아직 마음에는 닿지 못한 영화 중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가 최근까지 자리했었다. 누군가에게는 운명처럼 다가왔다는 영화. 사후세계로 가져갈 단 한 가지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고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반년 전의 나에게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졌었다. 높낮이의 변화가 별로 없는 영화를 보는 일은 물 조절이 잘 안된 라면을 먹는 것과 비슷했다. 그럼에도 인상 깊게 남았던 대사는 영화가 힘주어 말하는 한 마디: “I have learned that I was a part of someone else’s happiness.” “나도 누군가의 행복의 일부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화자의 마음은 당시의 나로서는 상상해 볼 수 없는 마음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엄마 생각을 잠깐 해보기는 했지만, 나를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영화를 처음 접하고 나서 다시 복기해 볼 때까지의 몇 개월이 단순히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보내야 했던 시간이었다면 그건 너무도 가혹한 대가였을 것이다. 지난겨울은 마치 사인함수의 음의 영역에서 보낸듯한 시간이었다. 몇 차례나 하향 조정한 기대치를 채우지 못했던 환경에 나도 모르게 등을 돌리고 홀로 살다가 쓸쓸함의 정점에서 ‘왜 이렇게까지 하며 살아야 하는지’ 물었던 때도 있었다. 당시에는 아득한 미래에서 날아왔다며 이 지금이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이 지금]의 이지은이 어쩌면 그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구겨지고 때묻었던 마음을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 스스로를 여름 햇빛에 오랫동안 널어놓아야 했고, 다행히도 길고 더웠던 여름을 보냈기에 빳빳하고 하얗게 펴질 수 있었다.
음울함의 정점을 찍었던 경험은 나에게는 생각지 못한 장점이 되어 돌아왔다. 그 이후로부터는 다음 학기는 어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지난 학기보다 낫기만 하면 괜찮았다. 하필이면 또 학부의 마지막 학기가 되어버렸기에, 나는 오늘만 사는 것처럼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며 다녔고, 그들과 함께한 시간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나에게 과분한 즐거움으로 남게 되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이번 학기를, 그리고 대학 생활을 정리하며 내가 이해한 사실은 ‘나도 누군가의 행복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되려 그 문장의 역에 가까웠다. ‘그 누군가들이 나의 행복의 큰 부분이었다는 것’.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의 행복도 없었을 거라는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너무도 다르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리고 내가 '나의 누군가들'에게 느끼는 고마움에서 다른 누군가의 행복의 일부분이 되는 ‘나'의 소중함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마음에 남게 될 친구들에게는 마음으로 다가오게 된 말을 전하며 작별 인사 건넸다. 너희들이 이곳에서의 나의 행복에 정말 큰 부분이었노라고.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말이 얼마나 큰 울림을 전달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학교를 떠나는 마음이 너무도 가벼웠기에, 다시 한 번 [원더풀 라이프]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