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17
2017.10
‘좋아한다’는 말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누군가와 더 가까워질 때에는 취미는 무엇인지, 혹은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하며 보내는지 묻는 일은 합당한 의례일 것이다. 서로가 편안함이나 즐거움을 느끼는 방법에 공통분모가 전혀 없을 때 보다 더 아쉬움을 남기는 경우는, 상대방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무언가를 말해 기대치를 한 껏 높인 다음 미지근한 호감을 보이거나 아무것도 아닌듯이 지나갈 때이다. “아 그 작가 괜찮더라구요, 나쁘지 않았어요." 좋아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책임감이 생기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방식으로 좋아하던지 순전히 그대의 자유지만, 그래도 나에게 특별한, 몇 안되는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했다면, 적어도 일정수준 이상 좋아해줬으면 좋겠다는 아주 말도 안되고 무례한 바람을 나는 남몰래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대가 나만큼 그것을 특별히 생각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있으랴! 지난 여름에는 부산에 사는 고등학교 친구가 잠시 상경한다고 연락을 한 적이 있었다. 좋아하는 친구지만 연락이 잘 닿지 않아 근 2년동안 만나지 못했었기에 식사를 같이하고, 술도 한 잔 한 것으로 모자라 나중에는 내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기도 했다. 우연한 계기로 2년동안 바뀐 서로의 음악 취향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백예린] 이라는 공통의 접점에 다다르게 되었고, 커져버린 동공과 들뜬 목소리, 그리고 호감을 보다 많이 표현하기 위해 왠지 모르게 빨라진 대화의 속도를 통해 우리는 서로가 ‘진짜’임을 알아차려 버렸다.
‘인류 최초의 불평등은 당일 수렵활동의 성공을 축하하며 누군가가 춤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다른 이들이 느낀 부러움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의 구절을 어불성설이라 생각하다가 노래를 부르는 백예린의 모습을 보고 이내 이해하게 되었다’는 나의 이상한 고백에 동감한다듯이 끄덕이던 내 친구는 그녀의 최근 공연에서 직접 찍은 영상을 보여주며 내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녀의 곡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또 앨범을 내주지 않는 소속사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다 어느새 잠들었는데, 다음날 깨어보니 마시려고 사온 캔맥주가 반도 비워지지 못한 채 그대로 김이 빠져있었다.
시중에는 ‘더 큰 호감’을 표현하는 다양한 단어들이 있지만 각기 다른 이유들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팬이다, 라는 말은 너무 식상하고, 내가 백예린을 하루에 몇 번씩 검색해보거나 잘 나온 사진을 찾아 핸드폰에 저장하지 않으니 덕질하는 것 같지도 않다. 사랑한다는 말은 참 예쁘지만 결이 다르고 최애(最愛) 한다는 신조어는 유사한국어(?) 같은 느낌이 들어 ‘방가방가’와 같이 어느새 사라져버릴 것 만 같다. 그렇다고 정말 정말 좋아해요, 혹은 진짜 진짜 좋아해요 하며 부사를 붙이는 일은 좀 구차하다.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라고 말했을 때 바로 등자열매 빛깔을 떠올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에는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색들이 있어 그대가 복숭아색을 떠올려 버린다 해도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는 그래서 ‘매우 좋아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가 새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혼자만의 소망을 갖고 있다; 비슷한 정도의 호감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확인 할 수 있도록.
“This man says he has read The Great Gatsby three times,” he said as if to himself. “Well, any friend of Gatsby is a friend of mine.”
And so we became frien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