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진동, 그리고 순대 한 접시
인생이 아무리 다사다난해도, 이렇게까지 사람을 궁지로 몰 수 있을까.
기댈 곳 하나 없는 상황에서 겨우 찾은 안정을 또다시 잃었다.
남편이 날 밀쳤지만 다행히 다치진 않았다.
시간은 무심히 흘렀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기의 심장 소리도, 주치의의 격려도, 산모수첩도 더 이상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긴 수렁이 나를 삼켜 들어갔다.
사건을 압축하면 단순하다.
그 여자는 스스로 이용당했다고 느꼈고, 남편은 달래는 메일을 보냈다.
관계를 진작 눈치챘지만 시험관 시술이라는 목표에 눈과 귀를 막아왔다.
임신 소식을 전했을 때의 냉담함도 “너무 기뻐서”라고 애써 해석했고, 이제야 겨우 “행복하자”는 말을 나눴건만, 입으로는 나에게, 손으로는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쓰다니.
사람은 한순간에 두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벼랑 끝으로 밀었다.
남편의 해명은 단 한 줄이었다.
“거래처 직원이라 정리하는 척이라도 해야 이후가 편할 것 같아서.”
차라리 입을 다물었으면 좋았을 말이었다.
그 여자는 남편의 첫 입원 때 병문안을 왔다.
내 상상과 전혀 다른, 마르고 잇몸이 드러난 얼굴.
남자들과 스치기만 해도 놀라 손으로 털어내던 그 여자가 결국 유부남과 관계를 맺었다니.
내내 부르짖던 도덕성은 어디에 있었을까.
하지만 그 여자를 탓할 마음은 없다.”
그도 아마 나를 측은히 여겼을지 모른다.
“당신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울은 거센 파도처럼 나를 집어삼켰다.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회색빛 커튼 뒤에서 하루를 까먹었다.
억지로 넘기는 건 오렌지 주스뿐.
목이 거부하니 액체만 삼킬 수 있었다.
그때, 뱃속에서 작은 진동이 일었다.
일어나, 배고파… 아기가 몸부림쳤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영동시장으로 향했다.
한가운데 포장마차, 김이 피어오르는 순대와 떡볶이 냄새. 순대 한 접시를 시켜 허겁지겁 삼켰다.
어린 시절 엄마와 처음 먹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김밥처럼 말린 순대를 소금에 찍어 오물오물 씹던 그 맛, 그 정.
주인아주머니가 순대를 더 얹으며 말했다.
“아유, 임산부가 잘 먹어야죠. 꼭꼭 씹어서 많이 먹어요. 이건 서비스예요.”
순간 부끄럽고도 서러웠다.
내 꼴이 얼마나 안쓰러웠을까.
엄마가 계셨다면 단 한 끼도 굶게 두지 않았을 텐데.
아주머니가 물을 내밀며 “체하면 큰일”이라며 눈길을 주는데, 감사와 그리움이 목을 메이게 했다.
남은 순대를 싸 주며 “언제든 오라”는 따뜻한 말에 봉지마저 뜨겁게 느껴졌다.
정신 차리자. 아기를 위해 먹어야 한다.
돌아오는 길, 나는 장바구니를 가득 채웠다.
먹자. 살자. 아이와 함께.
다음 시리즈 예고
불임 시리즈는 100화를 끝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곧 새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혼하지 않는 죄, 유죄〉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며 이혼을 결심하기까지, 그리고 이혼 소송 1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재판의 현실.
지독히 고단하고도 현실적인 기록, 그리고 그 이후의 미래까지 담아낼 예정입니다.
힘든 여정이지만, 함께 읽고 댓글로 응원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