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에서 사고 친 신랑
2001년 봄, 꽃내음이 진하게 퍼지던 계절에 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막내딸의 결혼식은 그저 평범하고 조용하게 지나가길 바라는 가족의 바람과 달리, 시작부터 어수선했다.
땀과 가죽재킷으로 얼룩진 결혼식 풍경
신부화장을 받기 위해 미리 도착했지만, 결혼식이 몰린 날이라 대기실은 이미 신부들로 가득했다.
차례를 기다리며 조급해진 마음은 남편의 후배가 차 키를 두고 내려버린 해프닝으로 더 바빠졌다.
드레스를 움켜쥔 채 언덕 위 예식장까지 걸어 올라가는 내 꼴은 우스꽝스러웠다.
다행히 외사촌 오빠 부부가 급히 차에 태워줬지만, 이미 등줄기엔 땀이 줄줄 흘렀다.
하객 수도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앞서 형제자매 셋이나 결혼을 치른 터라, 더는 친척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게 부모님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예식장은 시끌벅적했다.
남편이 오토바이 동호회에 속해 있던 덕분이었다.
라이더들이 가죽 재킷 차림으로 단체 등장하자, 하객들의 시선은 순식간에 그쪽으로 쏠렸다.
에어컨까지 고장 나 땀에 젖은 하객들 사이로, '저게 무슨 복장이냐'는 수군거림이 오갔다.
준비한 음식은 동이 나 몇몇은 식사도 못 하고 돌아갔으니, 예식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사진은 또 어떤가.
작은 키의 남편과 키를 맞추려 스니커즈를 신은 내 모습은 머리만 부풀린 ‘5등신 신부’였고, 초보 같은 사진사 덕분에 눈을 감은 하객들이 줄줄이 찍혀 있었다.
몇십만 원씩 들여 받은 앨범 속 사진들은 하나같이 민망하기만 했다.
아빠에게 고백하지 못한 미안함
결혼식 후 뒤풀이 자리에서 축하주를 과하게 마신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곯아떨어졌다.
술에 취한 채 서울로 떠나기 전 집에 들렀을 때, 아빠를 보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어릴 적 어디든 나를 데리고 다니던 아빠.
그러나 고입 입학 때 학교를 찾은 아빠가 선생님께 던진 한마디 때문에 궁지에 몰린 기억이 내겐 깊은 상처였다.
그때부터일까, 나는 아빠와 점점 데면데면해졌다.
객지 생활을 이어가며 접점을 잃어버린 채, 결국 결혼식 날 아빠의 손을 잡으며 오래 묵은 거리감을 마주해야 했다.
국민학교 입학식 날, 집에 처음 컬러 TV가 들어오던 날, 사랑니를 뽑던 날… 내 곁엔 늘 아빠가 있었다. 그런데 정작 결혼식 당일, 그 아빠와 한마디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식장에 들어서버린 것이다.
미안함과 아쉬움, 그리고 술기운이 뒤섞여 나는 아빠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울며 마음을 고백했다.
필리핀 보라카이, 간병인 체험 신혼여행
다음 날 아침, 깨질 듯한 두통에 시달리며 신혼여행 비행기에 올랐으나, 멀미와 구토는 끊이지 않았다.
이륙 대기 중에도 비행기 화장실에 매달려 있던 나를, 스튜어디스가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며 재촉했다.
그때의 당혹감과 수치심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도착지는 당시 신혼여행지로 인기 있던 필리핀 보라카이였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시 버스와 배를 타고, 습하고 끈적이는 열기에 지친 몸을 끌고 겨우 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파김치였다.
함께 간 세 팀과 더해 네 팀이 움직였지만, 진짜 문제는 남편이었다.
스쿠버 자격증이 있던 그는 ‘나 좀 보라’는 식으로 물속에서 과시하더니, 만지지 말라는 해초를 건드려 오른손이 퉁퉁 부어버렸다.
손을 쓸 수 없게 된 남편 곁에서 나는 랍스터 껍질을 일일이 발라 입에 넣어주었고, 씻는 것까지 도와야 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그의 아내가 아니라, 손발 노릇을 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첫 신혼여행에서조차 남편의 곁에서 먹이고 씻기는 일을 맡은 나.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곧이어, 진짜 간병의 시간이 우리 앞에 닥쳐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