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 이야기 EP.22-바람에 흔들리는 풍선 인형처럼

불임 22화. 나처럼 마음을 닫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by 나은



시누이가 다녀간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이번엔 아주버님이 찾아오셨다. 무릎 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다.

또 나누리병원이다.


형님과 함께 오셨고, 입원하는 날엔 조카가 병실을 찾았다.

형님 댁 맏아들은 나와 8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미혼인 그가 여자친구와 함께 나타났다.


아주버님을 병원에 모셔드린 뒤, 우리는 조카의 여자친구와 함께 오래간만에 밤거리로 향했다.

몇 년 만에 느껴보는 사람 냄새였다.


당시 영동시장 근처에는 ‘한신포차’라고 불리는 유명한 헌팅포차가 있었다.

밤이면 이 거리엔 젊은이들이 쏟아져 나와, 서울 한복판을 뜨겁게 달구곤 했다.

아침이 되면 거리엔 귀가하지 못한 젊은 영혼들이 남긴 흔적들이 흩어져 있었다.

토해낸 것들, 엉망인 얼굴, 해어진 구두, 풀려버린 셔츠 단추.

그 속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어제의 욕망들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그 네온사인 속으로 나도 오랜만에 걸어 들어갔다.

병원 특유의 알코올 냄새를 떨치고 싶었다.

오래간만에 마신 술은 기대처럼 나를 달구진 못했다.


남편을 불편해하는 형님, 조카, 그리고 나.

셋이서만 있고 싶었지만, 남편은 굳이 따라붙었다.

안주도, 분위기도, 이야기조차도... 그냥 그랬다.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는 남편.

웃기지도 않은 유머를 억지로 되풀이하며 분위기를 깬다.

입안에서 술은 알코올을 잃고, 맹물처럼 헛헛하게 맴돈다.


꽃을 팔러 다니는 아주머니가 술집의 전 좌석을 돌고서야 마지못해 우리 자리로 온다.

단돈 천 원을 벌벌 떨며 꺼내든 남편은 조카의 여자친구에게 꽃 한 송이를 건넨다.


같잖았다.


“작은 아버지는 참 자상하신 것 같아요.”

조카의 여자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이 인사인지, 립서비스 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몇십 년째 계속되는 ‘똥 시리즈’ 농담이 또 주 메뉴처럼 등장하고,

우리는 습관처럼 웃었다.

조카의 여자친구도 난감했을 것이다.


‘이걸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다 같이 웃는 분위기 속에서

그녀 역시 기계처럼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간만의 밤거리는 밋밋하게 흘러갔다.

기억에 남지 않을, 흘려보낸 시간처럼.


입원 기간 일주일 내내, 내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렸다.

조카 여자친구가 초밥을 사 왔다며 먹으러 오라는 전화.

막상 가보면 남은 초밥 몇 점이 전부다.


형님의 여동생도 찾아왔다.

한의사도 간호사도 아닌 그녀는

지방 자생병원에서 조무사 비슷한 일을 한다며

허리가 아프니 상담해 달란다.


병원 일정이 겹쳐 마음이 급해진 나는 부리나케 씻고 집을 나섰다.

거울 속 내 모습은 바람에 흔들리는 풍선 인형 같았다.


퇴원을 앞두고 아주버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형님은 일을 핑계로 먼저 내려가셨고,

무릎 수술을 받은 뒤 최소 3시간은 고속버스를 탈 수 없다며

일주일 정도 우리 집에 머물겠단다.


남편 없이, 아이 없이 나 혼자 지내는 이 집에서.


참... 난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않나?

불편함이 목을 조였다.


시댁 식구들은 늘 누군가에게 자기 일을 슬쩍 넘기는 데 익숙하다.

조금만 혼자 해도 될 것을, 굳이 남의 손을 빌리려 한다.


별일 아닐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다행히 형님이 올라와 아주버님을 데려가셨다.

하지만 두고 간 재킷은 또 내 몫이었다.

택배로 부쳐드리고...

외래 진료를 위해 올라오실 때면 연락이 왔다.

식사를 같이 하고, 고속터미널 쇼핑가를 함께 걷고,

버스표를 끊어 지방으로 보내는 일.


그 모든 것이 당연한 의무처럼 내게 주어졌다.


가끔은, 정말 가끔은 부럽기도 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다면.

병원에 갈 때 동행해 주고,

진료 후엔 음료 한 잔 나누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진료가 실패했을 때

그저 말없이 손을 잡아주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내 마음에 겹겹이 생긴 굳은살이 조금은 덜하지 않았을까?


그 생각이 떠오르면

아주버님의 연락에도 한 번 더 마음을 쓰게 된다.


적어도

나를 만나는 누군가만큼은

나처럼 마음을 닫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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