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 27화 –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다시 들었다. 놨다.
휴…
크게 호흡을 하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가해지고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진다.
느릿느릿… 오늘따라 벨 소리마저 어그적거린다.
햐~아. 역시… 안되니까, 모든 게 더 아프게 느리게 다가오는구나.
"잠시만요…" 간호사가 얼른 의사를 바꿔준다.
그 짧은 찰나가 그동안의 몇 년처럼 길게 느껴진다.
의사가 받는다.
"아, 여보세요…"
의사의 말도 어그적어그적 거린다.
왜 이리 다 느릿느릿 거리는 거야… 하는 순간,
"축하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정말 애쓰셨어요."
이 무슨…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뭐라고 한 거지?
추…카…. 뭐라고?
"네...........?"
정신이 몽롱하다.
어디에 맞은 양 혼란스럽다.
어지럽다.
"축하해요, 성공했어요. 임신입니다."
허~억! 그토록 듣고 싶었던 그 말이 이렇게나 허무하게 다가올 수 있나?
수천 번 생각했었다.
내가 듣게 되는 '임신 성공'은
온 하늘에 폭죽이 터지고, 꽃가루가 내려오고, 기쁨과 회한의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는….
그런데, 지금 너무 덤덤하다.
됐다는 거야?
안 됐다는 건가?
됐다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 모르겠어. 뭐라고 들은 거지?
"저, 됐다는 건가요? 임신인 거예요?"
살짝 언성이 올라간다.
서서히 가슴이 뜨거워진다.
잠깐의 공백이 미치도록 심장을 뛰게 한다.
아닌가? 역시 잘못 들은 건가?
"네, 임신 맞아요. 이제 곧 엄마가 되는 거예요. 축하해요."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다.
마치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다.
온기 있는 손바닥으로 내 등을 살포시 훔쳐내는 것 같다.
복잡미묘한 감정이 올라온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막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크게 웃을 것도 같고, 왕왕 울고도 싶다.
잠깐 목이 메어 대꾸를 못 한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요. 다 노력한 결과예요.
이제 남은 기간 잘 관리해서 튼튼한 애기 낳아야지요.
자세한 일정은 간호사한테 전달받으세요.
다시 한번 축하해요."
"네…에."
겨우 응답한다.
간호사가 이어서 뭐라고 뭐라고 하지만 하나도 안 들린다.
다시 전화를 해서 일정을 확인해야 할 것 같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멍~하다.
조금 기쁜 것 같기는 한데 생각만큼 크게 기쁘지는 않다.
다 뭐람, 이게 다 뭐람….
휴~우. 이런 거였나, 이 기분이었나….
모르겠다….
멍하니 생각 없이 벽을 응시한다.
잠깐 창밖도 바라본다.
겨울 하늘인데 맑다.
뽀얗다.
큰엄마가 생각난다.
'큰엄마, 감사해요. 다 덕분이에요…'
괜히 뭉클해진다.
머리를 가로 서너 번 젓다 전화기를 든다.
신호음이 울린다.
"여보세요." 한다.
"나야, 나…. 병원이랑 통화했는데…"
도중에 말을 자른다.
"했는데… 뭐?"
"나, 임신이래. 임신했대~~~~"
돌연 소리가 올라간다.
살짝 흥분한다.
들뜬다.
그런데….
저쪽에서 말이 없다.
일순간 정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길다, 침묵이, 왜 이리 긴 거지… 이다지도 긴 거지…?
"듣고 있어? 여보세요?" 했더니
"듣고 있어."
듣고 있다고? 무슨 반응이 그래? 무슨 말이라도 해봐?
놀랐니? 놀랐지? 놀랐구나? 나도 놀랐어…
그래도 감정이 전혀 없는 반응에 시무룩해진다.
아니야, 아니야…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내가 지금 병원으로 갈게, 바로 갈게." 한다. 그랬는데…
"어, 오지 마. 그냥 있어."
"왜? 갈게."
오지 말라고? 아침부터 전화해서 안 오냐고 극성이더니 이젠 또 오지 말라고?
이건 또 뭐니? 몰라…
그냥 이건 좋은 거고, 좋은 소식이고, 이제 다 해결된 거고 앞으로는 좋을 일만 있을 거고…
난, 그걸 즐길 거고, 그래도 되고, 그래야 하고, 그럴 수 있고…
께름칙한 남편의 반응을 무시한 채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간다.
2월의 겨울 날, 그 추위를 뚫고 병원으로 한달음에 달려간다.
택시 안에서 거듭거듭 생각을 고친다.
'착각이야, 내 착각이야. 좋은데 좋아서 좋으니까 표현을 못 하는 거야.'
나도 이렇게 놀라운데 놀란 거지.
'놀란 거야, 놀라서, 너무 놀라니까 감정을 못 싣는 거지. 그래, 그런 거야.'
병원에 도착한 후 입원한 층에 올라가니 복도 저기 저 끝 휠체어에 앉아있는 남편이 보인다.
난 포커페이스를 하고 막 신이 나서 막 웃으며 걸어간다
. 마주 보이는 표정은 그렇게 신나지도, 그렇게 즐거워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도 난 잔뜩 흥이 난 척 걸어간다.
그리고 막 주절거린다.
"내가 병원에 전화를 걸었어, 그런데 전화벨이 느리게 가는 거야… 그래서,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내내 주위가 회색빛이다.
시간이 멈춘 듯…
세상은 정지했는데 나 혼자 주억거리는 것 같다.
남편은 휠체어에 앉아 날 보지도 않고 주먹 쥔 손만 오락가락한다.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동안 반응이 없다.
그 흔한 어, 아~도 없다.
아니라고 해도, 못 본 척, 안 본 척해도 보이고 보인다.
감정 없는 저 표정, 표현 없는 저 몸짓, 온기 없는 눈빛…
순간 너무 머쓱해진다.
울컥 서러움이 올라온다.
몰라? 모르는 거야?
안 들려? 안 보여?
지금의 너는 뭐니? 도대체 누구니? 일순간 얼어붙는다.
내 입도, 내 몸짓도, 내 마음도…
"아, 피곤하네. 나 그냥 집에 가서 쉴게, 간다."
라고 말하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왈칵 차오른다.
어떻게 이래?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기쁜 거 아니야?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게 다 뭐야? 뭐가 이래? 왜? 내 인생은 왜 이래? 오늘조차…
이럴려고 그동안 10번의 시험관을 했나?
한 번, 두 번, 세 번… 세기도 숨찰 만큼의 그 숫자만큼 시험관을 하면서 고작 이럴려고…
다 해결될 줄 알았다.
성공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 알았다.
받았던 상처도, 느꼈던 아픔도, 되새기기 싫은 고통도 다 씻겨질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시작인 것 같은 이 더러운 기분은 뭐지?
더 힘들 것 같은, 그동안의 슬픔은 슬픔도 아닌 것 같은 이 께름칙한 기분은 뭐지?
햐~아. 언제부터지,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인 건 도대체 언제부터인 거지?
몰라, 몰라… 난 빠진 거야, 아주 깊은 수렁에 빠진 거야.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 깊이 빠지는 거야
. 아무도 날 꺼내줄 수 없어.
난 빠지고 있어.
더 깊이….
힘들어, 사는 게 힘들어.
하~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