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 이야기 36화 — 변화를 깨닫는 겨울

시댁의 위선과 모순

by 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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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몸과 마음을 깨웠다.

생각만큼 몸이 무겁지는 않았다.

입덧도 요란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겨울.

12월, 거리엔 캐럴이 울리고 세상은 축제로 들썩였다.


남편과 강남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남편 조카가 훔쳐간 귀걸이를 대신 사주러 가는 길이었다.





시댁의 그림자


시누이 집에는 딸만 둘.

고모부는 박학다식한 척하며 사람들을 몰아세우기 일쑤였다.

말발 좋은 시댁 식구들도 그 앞에서는 주눅 들었다.

남편도 마찬가지. 뒤에서만 쑥덕거릴 뿐.


정작 문제 생기면 나서 해결하는 고모부라

다들 그를 치켜세웠다.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때로는 기고만장 그 자체였다.


자식 문제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신혼 초부터 집에 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놀던 조카.

시누이는 “방문 잠그지 말고 놀아” 몇 번이나 주의를 줬지만

나중에 알았다.


샤프, 볼펜, 액세서리, 현금까지…

꼭 필요해서라기보다 그냥 가져가는 게 습관이었다.

사람은 자기 삶의 거울로 남을 본다.





밟히는 마음


처음엔 손버릇이 나쁘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살갑게 다가오는 아이들이었고, 주말마다 챙겨줬다.

지쳤지만 웃고, 챙기고, 배려하며 견뎠는데


결국 도둑질과 기저귀까지 싸서 가져가라는 시댁의 요구

황당하기만 했다.


명절마다 밤늦게 들이닥치고

혼자 눈 비비며 맞이하던 내 마음은 무참히 밟혔다.

아이 옷을 놀리고, 부산한 모습을 못마땅해하고,

잠 못 드는 아이를 달래는 나를 몰지각한 엄마라 손가락질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든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자식들의 손버릇은 모른 척했고,

밤늦게 남의 집을 들락거린 무례함도 웃어넘겼다.


나는 처음엔 그저 가족이니까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무심함이 내 자존을 갉아먹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내색하지 않는 삶


귀걸이를 사러 나서는 길.

배가 꼬이기 시작했다.

걸음을 멈추고 쉬었어야 했다.


하지만 남편을 기다리게 할 순 없다는 생각에

배를 움켜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늘 이런 식이었다.


남편은 모른다.

내가 내색하지 않았으니까.


내 삶이 꼬인 건 내 잘못이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남편에 대한 원망도, 미움도

이제는 없다.


그저 투명인간처럼,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간다.




변화를 택하다


다만 서류상으로도 깔끔하게 정리해

각자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거리에서 캐럴은 사라지고

구세군 종소리만 처량하게 울린다.


세상은 바뀌었다.

권리를 세우다 보니 감정은 주저앉는다.

인간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20대로 돌아가고 싶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안다.

다시 돌아가도 크게 바뀔 건 없다는 걸.


현실을 직시한다.

키오스크, 무인점, AI…

세상은 변했고, 나도 변해야 한다.


변하지 않으려 몸부림칠수록

내 여생만 괴로워질 뿐이다.





나는 성장한다


남편은 현실에도 없다.

혼자 과거에 갇혀 산다.

가부장적 태도, 남존여비 사상,

‘기집년’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며

스스로를 우대받아야 할 존재라 여긴다.


그런 결과, 그는 형제들에게도 외면당하고 산다.


나는 성장한다.

어리석음을 선함으로 착각했던 무지에서 깨어났다.

이 변화가 내 아이를 자존감 있는 사람으로 키워낼 힘이 되리라 믿는다.



스스로에게 보내는 응원


멈추지 마. 잘하고 있어.

당장 결실이 없어도

내년엔, 그다음엔 더 좋아질 거야.


너의 변화가 아이를 희망으로 이끌 거야.

믿어. 꼭 그렇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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