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대, 그리고 엄마의 온기
꿈꾸는 삶이 있었다.
그렇게 바라던, 그렇게 소망하던 임신.
그토록 원했던 그 일이 이루어진다면 멋진 엄마가 되리라 다짐했었다.
바르고 고운 마음가짐으로, 예쁜 모습으로, 바른 자세로, 좋은 생각만 하며 태교에 온 마음을 쏟으리라 다짐했었다.
고향에서 보고 자란 신사임당 같은 어진 어미가 되고 싶었다.
무너진 이상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처음 임신을 밝혔을 때 남편의 그 애매한 표정마저도 꾹꾹 눌러 삼키며 아이만 생각하며 버텼다.
잘 해내고 있다고 스스로 다독이던 그즈음, 남편의 난데없는 폭주가 시작됐다.
희망은 산산조각 나고 절망만이 깊은 구렁텅이로 날 끌고 갔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늘 단조롭고 차가웠다.
낙태…
입에 담는 것조차 죄스러운 단어.
한 번 입술에 올랐다 불에 덴 듯 사라져 버린 그 단어는 나를 더욱 고립시켰다.
고립된 임신
다시 혼자가 된 나는 외로이 임신 기간을 버텨야 했다.
먹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때가 되면 혼자 병원을 찾았고, 그토록 꿈꾸던 병원 소파에 앉아도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했던 기쁨은 뒤죽박죽이 되어 날 더욱 헐벗게 만들었다.
겨우 목으로 넘길 수 있었던 건 오렌지주스 한 잔.
달콤한 당분이 나와 아이의 유일한 영양분이었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적어도 아이한테만은… 그래, 아이는 시간에 맡기자. 알아서 잘 자라줄 거야.’
스스로에게 부질없는 위로를 하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영동시장을 하릴없이 떠돌다 코 끝을 당기는 냄새에 발길이 멈췄다.
뱃속이 요동쳤다.
먹으라고, 어서 먹으라고 몸이 나를 몰아세웠다.
그 순간 어린 시절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처음 순대를 본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다.
꽈리처럼 말린 김밥 같은 그 모양이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꿉꿉한 냄새는 왠지 하층민 음식 같아 손이 가지 않았다.
'먹으면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 일꾼이 될 것 같아... '
이상한 강박이 어린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한 작은 온기
중학생이 되던 해.
엄마와 시장길을 걷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 500원어치를 샀다.
엄마 한입, 나 한입.
저녁 준비에 바쁜 엄마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오물거리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눈빛에 모성애가 스며들고,
저녁노을은 더 붉게 타올랐다.
순대는 내게 온기였다.
다시 선 가판대
그렇게 다시 섰다, 순대 가판대 앞에.
식어버린 감성이 그 꿉꿉한 냄새에 이끌려 멈췄다.
간과 오도독뼈가 섞인 순대를 허겁지겁 씹어 삼켰다.
호로록 목구멍으로 밀어 넣자
몸이 따뜻해지고 마음도 잠시 안도했다.
‘그래, 이 맛이지.’
그리고 엄마가 떠올랐다.
순대를 삼키며 겨우 붙잡은 의지가
집 문을 여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시장 골목의 따뜻한 김 냄새는 사라지고
현관 안에는 차가운 적막이 먼저 나를 맞았다.
거실 한가운데,
남편이었던 사람이 웅크린 채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들숨과 날숨이 가슴을 긁으며 오르내렸다.
몸을 옥죄는 공포
분노가 치밀어
한 치 망설임도 없이 괴성이 터졌다.
몸을 돌리자 그는 놀란 듯
나를 더 세게 옥죄었다.
움직이기조차 쉽지 않았다.
나는 결사적으로 저항하며 소리쳤다.
“꺼져, 당장 나가!”
숨이 가빠지고 온몸이 떨렸다.
불쾌한 감각을 억누르며
다시 눈을 감았다.
늪에 빠지다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또 다른 장면이 스며들었다.
발이 진흙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중학교 시절, 비 온 뒤의 등굣길.
연탄 공장이 있던 골목은 하룻밤 새 뻘밭으로 변해 있었다.
한 발을 내딛자
진흙이 발목까지 차올랐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 없는
임전무퇴의 순간.
‘정신 차리자. 여기서 빠져나와야 한다.
누가 도와주지 않는다.’
차근차근 발을 떼자
거짓말처럼 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은
그리고 지금,
내 몸에 그 기분이 스며든다.
상기된 불쾌한 기운이
나를 잠식한다.
싫다, 싫다. 되뇔수록 더 싫어지는 감각.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떠 있다.
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 있는 걸까.
아니, 분리되었기에 이렇게 견디는 걸까.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다.
떨어질 만큼 다 떨어진 건지도 모른다.
나는 스스로 중얼거린다.
“어쩌라고…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