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해
대장 내시경 검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서관에 들러 독서토론 때 함께 나눌 책을 빌리고, 노트북을 빌려 열람실에 오래 앉아 있었다.
그곳에는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을 버텨내고 있었다.
머리 희끗한 어르신,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 그리고 나처럼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이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도 저 자리에 앉아, 내 몫의 오늘을 꾹꾹 구겨 넣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중간중간 톡이 쉴 새 없이 울렸다.
한 학교 엄마였다.
내일 있을 체험학습에 아이를 보내지 않겠다고, 선생님이 그러길 바라는 것 같다고...
불안과 강박이 또다시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
나는 성심껏 희망적인 답을 달아 보냈지만, 단단한 철옹성 같은 그녀의 불안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톡은 끊임없이 날아왔고, 결국 그녀는 ‘아이를 보내지 않겠다’는 결론으로 스스로를 몰아넣고 있었다.
그 밑바닥에는 깊은 자격지심이 있었다.
나 역시 수없이 겪어온 감정이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불안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불안은 내 불안을 자극했고, 결국 아이에게까지 전해져 힘겹게 만들었다.
나는 늘 ‘척’을 싫어했다.
아닌 척, 괜찮은 척, 대범한 척.
하지만 아이를 둘러싼 환경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좋아해 달라 애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더 질리게 만들 뿐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회피한다면 나는 편할지 몰라도, 아이에게는 더 큰 짐이 된다.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아이를 위해 대범해지는 것.
“오늘은 힘들지? 그럼 조금 쉬자.”
“버거우면 릴랙스해도 괜찮아.”
아이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
선생님을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상황을 ‘선생님 탓’으로 돌리면 내 마음은 좁아지고 인내심은 한계에 달한다.
결국 흐려진 판단력은 아이를 더 몰아세울 뿐이다.
완벽한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문제없는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아프지 않고, 학교에 가지 않겠다 떼쓰지 않는 아이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긍정적으로 판단하려 애쓰는 나 자신이 기특하다.
하지만 부모의 센 호흡, 웃지 않는 눈빛, 말과는 다른 우울한 기운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해진다.
민감한 아이는 불안도가 높아지고, 문제 행동으로 이어져 결국 낙오자 취급을 받는다.
나는 더 나아지길 바라지 않는다.
그저 무탈하게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 자체로 감사하다.
그러나 문득, 쏟아지는 긍정 메시지는 내 안의 불안을 막지 못한다.
나는 불안한 인간이다.
내가 감히 누구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까.
그 엄마가 원하는 것은 내 대답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속에 가득 찬 불안을 분출할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칠 수 있는 갈대밭처럼.
때로는 그 넋두리가 버겁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는 미약한 인간이 아니던가.
엄마도, 나도, 한낱 인간일 뿐이다.
나는 답장을 멈추고 나를 정리했다.
꽉 막힌 하수구 같은 마음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다.
아직은 최악이 아니다.
견딜 수 있다.
더 견딜 힘이 내게 남아 있다.
오늘도 그렇게, 나는 버티고 있다.
그리고 조용히, 다짐한다.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