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유언
엄마는 묻지 않으셨다.
그저 혼자서 답하듯 말씀하셨다.
“괜찮아. 용기를 가져.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다 지나가니까…”
아빠의 병실에서
엄마와 함께 아빠 병문안을 갔다.
얼굴 가득 검버섯이 피고, 몸은 더 말라 있었다.
과묵한 아빠는 아무 말씀도 없이 내 손에 용돈을 쥐여주셨다.
6인 병실엔 상주하는 보호자 어르신이 있었다.
대부분은 진폐증 환자들이었다. 과거 탄광에서 일하다 얻은 병이었다.
국가의 보상이라지만, 결국은 죽음을 기다리며 무료 밥만 제공되는 병원 생활.
부지런하셨던 아빠가 그곳에서만 5년 넘게 누워 계셨다는 사실이 그제야 뼈저리게 다가왔다.
전화라도 드리면, 큰 소리로 동문서답하시는 귀.
남편의 눈치에 핑계를 대며 무심했던 지난날들이 죄처럼 떠올랐다.
아빠가 내미신 돈에는 엄마의 극성이 배어 있었다.
나는 모른 척 돈을 받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다시 세우는 삶
나는 번개장터 같은 가판대에서 신문을 모조리 챙겨 일자리를 찾았다.
여성센터의 전산회계 교육, 학습지 전화 상담 아르바이트…
전산회계 2급 자격증을 따고, 작은 일이라도 내 손으로 벌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나보고 지금 오라고? 많이 안 좋아?”
아빠가 밤에 화장실을 가다 쓰러지셨다는 것이었다.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병원 측의 요청.
나는 망설임 없이 터미널로 달려갔다.
멀리 있다는 핑계, 남편의 반대에 순응하며 아빠를 외면했던 지난 과오를 만회할 기회라 여겼다.
아빠와의 동행
그날부터 나는 병원에서 아빠와 함께 지냈다.
식사를 챙겨 드리고, 밤에는 화장실 가시는 기척에도 번쩍 눈을 떴다.
아빠도 그제야 외로움에서 조금 벗어나셨는지, 내 곁에 있음을 느끼시는 듯했다.
주말이면 형제들이 교대로 돌봤다.
하지만 아빠는 언제나 나를 불렀다.
“집에 가서 쉬어라.” 하셨지만, 결국 곁에 있는 내가 더 편하셨다.
어릴 적에도 그랬다.
TV를 사러 갈 때도, 자전거를 살 때도, 사랑니를 빼러 갈 때도, 늘 아빠와 함께였다.
급성간염으로 입원했을 때는 하루 세끼를 챙겨주셨다.
그렇게 내 곁을 지켜주셨던 아빠 앞에, 나는 이제 와서야 서툰 효도를 하고 있었다.
아빠의 말, 아빠의 바람
어느 날, 아빠가 산책을 제안하셨다.
병원 마당을 거닐며 텃밭, 빨래터, 풍경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셨다.
잠시 벤치에 앉아 뜻밖의 말씀을 꺼내셨다.
“아버지는 여한이 없다. 혹시 위중해져도 호흡기는 꽂지 마라. 아버지는 잘 살았다.
너는 준이나 잘 키워라. 엄마 살 것도 다 준비해 놨다. 나랑 엄마 묻힐 자리도 해놨으니 장례 때 너무 울지 마라.
너한테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서운해하지 마라…”
그 순간 눈물이 터졌다.
아빠와의 오랜만의 대화가 나를 무너뜨렸다.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아빠, 오래오래 사셔야죠. 준이 대학교 가는 것도 보셔야죠. 금방 괜찮아지실 거예요.”
하지만 그날의 햇살과 바람은, 마치 이별을 예감하게 했다.
남은 후회
진폐로 숨 가쁘게 걷던 아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마다 나는 내 비염과 호흡곤란조차 아빠를 떠올리며 공포에 사로잡힌다.
무엇보다 마음을 짓누르는 건, 아빠의 유언 같은 말씀을 지켜드리지 못한 것.
식구들이 모두 동의했음에도, 나만의 철없는 주장으로 결국 호흡기를 꽂았다.
그날 이후, 나는 불효막심한 딸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