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는 늪...
주중에는 내가 병실을 지켰다.
아빠는 한 끼 제공되는 식단을 반도 채 드시지 못했고, 남긴 음식을 내게 권하시곤 했다.
일부러 남기는 건 아닌지, 날 위해 애쓰는 듯 보여 더 먹먹했다.
침상 곁에 앉아 아빠와 나눈 몇 끼의 기억은 지금도 따스하다.
시트를 갈아드리고, 빨래를 해 병원 뒤마당 빨랫줄에 널던 시간. 병원에서의 하루는 늘 일찍 시작됐다. 연세 지긋한 환자들은 밤 9시도 되기 전에 잠들고 새벽같이 깨어났다. 불 꺼진 병실에선 들쑥날쑥한 호흡이 뒤엉켜 울렸다.
아빠의 잠꼬대는 점점 심해졌다.
“어... 어... 나도 가야지... 워어...”
죽음을 앞둔 이들이 스스로 느낀다는 글이 떠올랐다.
저승사자를 본 듯 불안한 잠꼬대라 했는데, 그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병실 불이 꺼지면 나는 휴게실에 앉아 멍하니 TV를 켰다.
아이들이라도 화면에 나오면 심장이 조여와 얼른 채널을 돌렸다.
독립을 생각했지만, 고향에선 마주칠 인연이 많아 쉽게 정착을 결정하지 못했다.
그 무렵, 중국에 있던 큰언니가 자주 전화를 걸어왔다.
사업을 접고 귀국하려는 눈치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중국의 상황.
“이참에 깨끗이 정리하고 돌아와. 고향에서 새롭게 정착하자.”
나는 대책 없는 희망을 건넸다.
언니에겐 그것이 출구였을까.
결국 조카들과 언니만 귀국했다.
가져온 짐은 너무 단출했다.
엄마는 금세 눈치챘고, 나도 어설프게 감지했다.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지 뭐...”
과거엔 심천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직원 기숙사까지 둘 정도로 번창했는데, 모든 게 무너졌다.
엄마와 내가 지키던 큰집에 세 식구가 합류하니 집안은 북적였다.
나라는 복지가 풍성해졌고, 취업 지원 프로그램도 많았지만 나는 두고 온 아이 생각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결국 형제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아이를 데려오려 했지만, 남편은 벼락같이 붙잡고 놓지 않았다.
나는 여벌 짐만 챙겨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남편은 끊임없이 연락을 했다.
아이의 목소리를 빌려 “엄마, 보고 싶어. 빨리 와...”
아이의 사진, 영상이 잇달아 도착했고, 장문의 문자와 메일엔 ‘잘못했다, 앞으로 잘하겠다, 믿어달라’는 호소가 담겨 있었다.
나는 믿은 게 아니었다.
그저 아이를 두고 나온 죄책감이 견딜 수 없었다.
불임으로 고통받던 시절, “아이만 허락하신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최선을 다해 양육하겠다” 수없이 기도했는데, 지금 이렇게 아이를 두고 떠나 있다니… 남편은 내 가장 약한 점을 교묘히 찔러왔다.
결국 나는 다시 서울집으로 돌아갔다.
차 안에서 마주한 아이는 놀란 듯 어리둥절했지만, 거부도 환영도 뚜렷하지 않았다.
장애로 인해 지금의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집에 도착하니 집안은 깨끗하게 정리돼 있었다.
“어제 하루 종일 청소했어.”
남편은 말했다. 아이와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아이의 얼굴은 한층 밝아 보였다.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미안해, 준아. 엄마가 정말 미안해. 널 두고 나가는 게 아닌데… 등 떠밀려 쫓겨나도 버텼어야 했는데… 미안해.”
꼭꼭 씹어 삼키는 아이를 바라보며 끝없이 자책했다.
비교할 선택지는 없었다.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것뿐.
그래도 지금, 내 옆에서 아이가 손을 잡고 잠들 수 있음에 감사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