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 시리즈 67화. 아무도 없던 자리에

그가 있었다, 미행자로...

by 나은


병원을 다녀왔다.

카페 창가에 앉아, 연필 끝으로 의미 없는 선을 긋듯이 마음을 주적거린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름은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며 가을을 밀어내겠다고 버둥대던 계절.

그런데 새벽녘, 나도 모르게 이불을 끌어당겼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마음이 움츠러들면 몸은 더 과하게 신호를 보낸다.

“나 좀 보라”는 듯이, “나 아프다”는 듯이.


창 너머로 쏟아지는 빛은 황금빛 햇살이 아니었다.

우울이 한 겹 덧씌워진 잿빛, 마치 울음을 예비하는 얼굴처럼 흘러내렸다.





보험이라는 이름의 부재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문득 오래전 가입했던 보험이 떠올랐다.

남편의 친구를 통해 억지로 들었던 보험. 그는 늘 고개를 저었다.

“보험은 죽으라고 고사 지내는 거야. 난 필요 없어.”


그 말이 얼마나 어리석고 잔인한지 그때는 몰랐다.

결국 사망보험금 없는 조건으로 들었고, 그는 대책 없음을 자랑이라도 하듯 떠들어댔다.


만약 내가 세상을 떠난 뒤, 아이와 누군가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될까.

뒤늦게야 알았다.

그는 철저히 자기만 아는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말을 흘려듣고, 또 웃어넘겼다.

어리석게도.





의사의 말, 마음의 흔들림


진료실 문을 열자 의사는 언제나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했다.

허리가 불편한 나로선 그 모습이 오히려 짠했다.

“최근 기침 때문에 힘들지 않으셨어요?”

CT에서 폐렴기가 보인단다.


다행히 대장은 깨끗했다. 4년 전 수술 자리도 깔끔했다.

그러나 췌장 수치가 올랐다.

3개월 뒤 피검사를 다시 해보자고 했다.


순간,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다시 떠올랐다.

오른쪽 날갯죽지에서 밀려오던 불편함.

숨조차 막히는 순간마다 내 머릿속엔 ‘췌장’이라는 단어가 번뜩였다.


혼자의 수술, 혼자의 회복


나는 4년 전 수술날을 잊을 수 없다.

아침 이른 시간, 혼자 캐리어를 끌고 병원 언덕을 올랐다.

목사님의 전화를 받았을 때도, 나는 늘 그랬듯 씩씩한 척 웃었다.

“금방 똑 떼고 올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불쑥 밀려온 질문.

‘정말 괜찮은 거야? 겁 안 나? 무섭지 않아?’


그날도, 그 후에도,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회복실에서 목이 타들어가 물 한 모금 간절히 원할 때도, 병실 천장만 바라보며 무력하게 누워 있을 때도.

물 떠 올 사람이 없었다.

결국 옆 산모의 남편에게 간절히 부탁해야 했다.


출산 직후도 그랬고, 암 수술 직후도 그랬다.

퇴원길에도 혼자였다.

끌고 온 캐리어를 내리막으로 밀며 스스로를 달랬다.

‘괜찮아. 인생이 다 그렇지 뭐…’

하지만 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울분은 달랐다.

‘왜 나만 이렇게 홀로 서야 하는 거지? 왜 나에겐 아무도 없던 거지?’



그리고 오늘


그런데—늘 무심하던 남편이 오늘은 달랐다.

아니, 달라진 게 아니었다.


그는 내 곁에 있는 게 아니었다.

멀찍이서, 그림자처럼.

오늘 그는 나를 미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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