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나를 빠트리다
새 집으로 이사한 뒤, 남편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간간이 빨래 더미만 던져놓고 사라지는 그의 등에 대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실패한 시험관 시술이 어느덧 다섯 번째를 넘어선 뒤였다.
나는 말을 잃었다.
용기 내어 물어도 돌아오는 건 “아, 뭐… 몰라.”
그게 전부였다.
화낼 일인가?
나는 단지 시험관 시술에 실패했을 뿐인데, 왜 이토록 겁이 나는지.
피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반나절의 공포, 그때야 나는 불안이 사람을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만드는지 알았다.
남편이 없는 집.
세대 내 다른 이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너무도 조용한 곳.
정적을 깨는 일은 오직 우리 집에서만 파생됐다.
어느 날, 캔맥주 한 캔을 따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식탁에 앉았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었다. 반 캔도 채 마시지 못했는데, 문이 열렸다.
남편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허구한 날 술이나 마시고 있으니, 될 일도 안 되겠다.”
그의 목소리가 번개처럼 날아왔다.
병원 일정을 따라가며 술을 입에 대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의사는 몸이 쇠약해졌으니 쉬어가자 했고, 나는 그저 반 캔을 따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다음은 기억이 없다.
참아왔던 울분이 터진 건지, 주먹이 내 머리를 때린 건지.
눈을 뜨니 머리가 지끈거리고 손끝에 딱딱히 굳은 피가 묻어 있었다.
거실 바닥.
30평대의 넓은 공간, TV장 반대편까지 번진 핏자국.
내가 누워 있던 자리 주변이 까맣게 말라붙은 피로 얼룩졌다.
머리카락에도, 옷자락에도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이러고 그냥 갔다고? 나를 이렇게 두고?’
세상은 불친절했다.
너무 불친절했다.
나는 치우고 싶지 않았다.
맞아서 흘린 피를 스스로 닦아내고 싶지 않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역시… 미안해서 전화했겠지.’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여보세요?”
“조금 있다가 소파 갈 거니까, 집 좀 치워놔.”
뚝.
잠깐, 이 상황을 모르는 걸까?
아니지. 알면서도 저렇게 말하는 거겠지.
괜찮냐는 한마디도 없이.
몸이 저절로 일어났다.
곧 도착할 소파 기사들이 이 거실을 보면?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피로 물든 이 방이 그들의 가십거리가 되긴 싫었다.
부산스레 움직이며 핏자국을 닦았다.
자욱이 사라질수록 서러움이 밀려왔다.
‘괜찮아, 괜찮아. 다 지나갈 거야. 그리고 언젠가 갚아줄 거야. 네가 가장 외로울 때, 나는 떠나는 것으로 갚아줄 거야.’
벨소리가 울렸다.
라임색 소파가 들어왔다.
얼룩진 거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