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 시리즈. 82화. 희망은 불행를 불러온다, 빠르게

나는 다시 고립되었다.

by 나은

새벽녘, 열린 창문 틈으로 계절을 건너온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구겨진 이불을 끌어당기며 잠결에 깨닫는다.

가을이 시작되었다.

24도. 며칠 전만 해도 요란히 돌아가던 에어컨이 이제는 묵묵하다.


주말 오후가 되면, 아이 덕에 루틴처럼 돌아가는 ‘여름의 일상’이 다시 찾아오겠지.

나는 늘 하던 질문을 건넨다.

“이제 9월이야. 가을이 됐지? 가을엔 덥지 않아. 에어컨을 켜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아이의 대답은 뻔하다.

“안 켜.”

그러나 막상 에어컨을 못 켜게 하면, 몇 차례 난리가 날 것이다.


발달장애를 잘 몰랐을 때는 그 모든 것이 ‘문제행동’으로 보였다.

아이는 사춘기의 반항과 함께, 부정과 불안을 동시에 품었다.

늘 하던 것을 빼앗기는 순간, 아이는 출구 없는 터널에 갇힌 듯 숨이 막혀했다.

휴무일을 맞은 중국집 앞에서 아이가 느낄 공포를, 나는 알고 있었다.

해결책 없는 답답함을, 나 역시 겪어왔으니까.


그날 밤—남편이 잠꼬대로 여자의 이름을 뱉던 순간.

나는 망연자실해 침대에 앉아 있었다.

“뭐? 뭐라고 했는데…”

그가 되묻는 목소리에,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내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오는 순간, 남편과 그 여자가 하나로 엮일 것만 같았다.


‘이 모든 게 다 내가 아이를 못 낳아서일까.’

만약 남편이 불임이라면 나는 어떤 마음일까.

겉으로는 “아이 없이도 살지”라 말했겠지만, 속마음은 그리 쿨하지 못했을 것이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나는 바짝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겨울 내내 발품을 팔아 찾던 집 중 한 곳을 골랐다.

신혼 초 살던 곳보다 세 배는 비싼 집이었지만, 남편은 선뜻 보자고 했다.

논현동 가구골목 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끄러움과 고요가 갈리는 곳.

벨을 누르고 기다리자 복도의 불이 꺼졌다가, 센서가 켜지며 희미한 빛이 번졌다.

옆에 서 있던 젊은 여중개사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어색한 시선.

나는 묻고 싶었지만, 생각을 접었다.


이건창호로 둘러싸인 두 번째 집.

베란다 한쪽 귀퉁이만 열리는 구조는 마치 집 안에 갇힌 모양새였지만,

깨끗한 바닥과 벽, 그리고 월풀 욕조가 마음을 끌었다.


이사 전 집은 경사진 1층이었다.

창 앞 주차장의 먼지, 자주 막히는 화장실, 남편의 교통사고로 비운 3개월 동안 벽을 뒤덮은 곰팡이…

돈벌레가 천장을 기어 다니던 그곳은 6년을 살았어도 미련이 없었다.


하지만 새 집은 달랐다.

햇살이 스며드는 거실, 안정적인 방범창, 정적이 흐르는 주택가.

무엇이든 잘될 것만 같았다.

낮에도 불을 켜야 했던 전 집과 달리, 세 개의 방으로 햇살이 고루 내리쬐었다.

안정적인 사각의 안방, 드레스룸, 두 개의 욕실—모든 것이 완벽했다.

바라는 바가 다 이루어질 듯, 웃을 일만 있을 것 같은 집.

희망과 함께 우리는 그 집에 입성했다.


그러나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거실 바닥에 피가 번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고립되었다.



작가의 이전글불임 시리즈. 81화.  남편의 외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