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륙에 새겨진 독립의 숨결

항일로드 2000km - 김종훈

by 레토

광복 80주년, 일본에서 다시 만난 독립투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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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 기자의 『항일로드 2000km』는 일본 열도 곳곳에 새겨진 독립운동가들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 떠난 기록이다. 저자는 나가사키에서 도쿄에 이르기까지 10개 도시, 50곳의 역사 현장을 누비며 교과서 밖으로 밀려난 이름 없는 영웅들의 숨결을 추적한다.


흔히 관광지로만 기억되는 일본의 도심 뒤편에는 윤봉길 의사가 암장 되었던 가나자와성, 윤동주 시인의 도쿄 하숙집 터 등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아픈 역사가 숨어 있다. 저자는 화려한 명소 대신 잡초 우거진 터와 위령비 앞에 서서 이름 없는 영웅들에게 술 한 잔을 올리며 그들의 고독한 투쟁과 희생을 되살려낸다.

이 책은 우리가 누리는 일상이 일본 땅, 심장부에서 헌신했던 이들의 투쟁 위에 세워졌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일본 여행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묵직함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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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9

윤동주의 하숙집은 그가 다니던 도시샤대학보다 교토대학에서 더 가까웠다. 교토대학에 다니는 송몽규의 하숙집 근처에 집을 얻은 까닭이다. 둘의 하숙집은 불과 300미터 떨어져 있었다. 그만큼 서로 의지하고 믿었다. 어려서부터 둘 다 공부도 잘하고, 글도 잘 썼다.

p.173

1942년 가을 교토로 넘어온 윤동주는 이듬해 7월 송몽규와 함께 검거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5년 순국한다. 두 사람의 묘는 둘의 고향 명동촌으로 향하는 산중턱에 자리해 있다. 쉬이 찾아갈 수 있는 위치는 아닌데, 그나마 다행히도 두 사람 모두 옥구구밭 지나 푸르고 아름다운 곳에 잠들어 있다. 송몽규의 묘에는 ‘청년문사 송몽규’라 새겨진 묘비가, 윤동주의 묘에는 ‘시인 윤동주’라 적힌 묘비가 세워졌다.


찬란한 청춘들 윤동주와 송몽규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영화 <동주>가 남긴 흑백의 잔상으로 이어졌다. 교토 하숙집 사이의 거리 300미터. 그 짧은 길을 오가며 문학적 재능을 나누던 두 청년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비록 성격이 달랐기에 독립을 향한 발걸음의 차이가 있었을지라도 그들이 품었던 조국에 대한 뜨거운 마음만큼은 다르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온전한 나라에서 숨 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들의 치열했던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배웠던 역사 교과서는 윤동주라는 이름에는 익숙하지만, 송몽규라는 이름에는 인색했다. 나 역시 영화 <동주>를 통해 배우 박정민이 연기한 송몽규를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그가 짊어졌던 삶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다. 빛바랜 사진 속 두 청년의 모습에 영화적 이미지가 겹치면서 그 시절의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어느 시대인들 찬란하지 않은 청춘이 없겠으나 시대의 어둠에 맞서 기꺼이 자신을 던진 그들의 청춘은 유독 아프고도 고귀했다.


윤동주 시인의 수많은 명시 중에서도 유독 내 기억에 깊이 박힌 것은 「쉽게 쓰여진 시」다. 「서시」나 「별 헤는 밤」의 서정성보다 타국에서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아침을 기다리던 시인의 고뇌가 절절했다.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 시를 쓰는 것조차 부끄러워했던 그의 표정과 생각이 행간마다 배어 있는 것 같았다. 300미터 거리에서 서로를 의지했던 두 청년은 이제 고향 산중턱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그들이 지켜낸 것은 단순한 땅의 회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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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3

이 의사를 생각하며 위령탑 앞에 태극기를 펼쳤다. 대한독립이라 새겨진 유기잔에 한국 소주를 따랐다.

‘의사 이봉창을 기억합니다.’

p.254

인근 동사무소를 찾아 ‘이봉창 의사 생가’에 대해 문의했다. 동사무소 직원은 질문에 난감해하며 용산구청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용산구청 측은 “표지석 관리가 소홀한 것도, 표지석 지번이 잘못된 것도 다 알고 있다.” 고 인정하면서 “(이 의사의) 생가 터는 아파트가 재개발되고 있는 골목 입구라서 (복원이) 사실 어렵다”며 “그래도 (표지석 주변을) 한 달에 한 번은 청소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나는 당시 상황을 취재한 후 기사를 작성했고, 기사가 나간 뒤 용산구를 행해 질타가 쏟아졌다.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용산구청에 문의하니 2014년의 기사를 보고 민원이 많이 들어와서 원래 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시로 옮겨 보관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2020년 10월 이 의사 생가터에 이봉창의사역사울림관이 개관했다.


정신의 뿌리, 이봉창

학창 시절, 독립은 강대국의 승리에 따른 우연한 결과일 뿐이라 냉소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역사의 본질을 놓친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뿌리 정신이 사라진 나라에 땅만 되찾는 것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토 한 명을 처단한다고 당장 국권이 회복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안중근과 같은 이들이 바친 목숨은 우리 민족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거대한 상징이 되었다. 이런 분들이 없었다면 설령 독립이 되었다 한들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 정체성의 근간이 없었을 것이다.


특히 tvn의 <벌거벗은 한국사>를 통해 알게 된 이봉창 의사의 삶은 영웅 이전에 한 인간의 각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처음부터 투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완벽한 일본인이 되어 성공하기를 꿈꾸며 일본어를 연마하고 일본식 이름을 얻으려 했던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그러나 성실하게 일하고도 만년 2등 시민으로서 겪어야 했던 끊임없는 차별과 멸시는 그를 냉혹한 현실로 이끌었다. 단순히 일왕을 보려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연행되었던 굴욕적인 경험은 그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성공을 꿈꾸던 청년에서 일왕의 마차에 폭탄을 던지는 의사가 되기까지 그가 겪은 인생의 굴곡은 당시 누구나 느꼈을 법한 울분이었으나 그 선택은 결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지켜낸 것은 단순히 땅의 회복이 아니라 억눌린 2천만 동포의 자주권과 무너진 자존감이었다. 그의 투쟁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뿌리를 내리고 서있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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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20

‘추도, 간도 대지진 조선인 희생자’라 새겨진 비석이 있다. 누가 먼저 왔다 갔는지 500밀리리터 물병 하나와 생화 한 단이 놓여 있다. 누군가 마음을 두고 간 흔적이기에 감히 치울 수 없어 아래쪽에 태극기를 펼쳤다. 그 위에 대한독립이라 새겨진 유기잔을 꺼내 한국 소주를 따랐다.

이렇게나마 1023년 간토대지진 후 유언비어로 학살된 조선인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후인으로서 마음을 다할 뿐 술을 따르고 절하기를 반복하니, 뒤에서 가만히 서 있던 남성이 말을 건다. 한국인이냐고. 그렇다고 하니, 알았다면서 자리를 떠난다. 우호적인 시선은 아니었다.

p.10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수도권인 도쿄·가나가와·지바 등에 추정 규모 7.9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10만 5000여 명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 되었고, 주거지를 잃은 사람은 200만 명이 넘었다.

그만큼 간토 대지진은 충격이 큰 일이었다. 그러나 간토 대지진 당시 일어난 조선인 학살 또한 큰 충격과 상처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p.324

그럼에도 조선인 희생자 추모제를 일본 극우 단체들이 방해하고, 도쿄지사는 지금까지도 추도문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역사 왜곡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추도비 왼쪽으로는 “진정한 위령과 슬픔을 딛고 쌓아 올린 한일 양 국민의 영원한 우정의 초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인 작인 비석이 하나 더 있다. 그러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간단하다. 사실에 대한 인정과 사과다.

p.328

“1923년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여 일본의 군대·경찰·유언비어에 현혹된 민중에 의해 많은 한국·조선인이 살해당했다. 도쿄의 서민 거주지에서도 식민지하의 고향을 떠나 일본에 와 있던 많은 사람들은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귀중한 생명을 빼앗기고 말았다.”


멈춰버린 100년, 간토의 진실

나는 이 내용을 배운 기억이 없는데, 아이가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며 푸는 기출 문제집에서 이 사건을 발견했다.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1923년, 지진의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고 불을 질렀다"는 악의적인 유언비어가 퍼졌고 그것이 무고한 이들을 향한 참혹한 학살로 이어졌다. 이후 최태성 선생님이 설명해 주시는 영상을 아이와 함께 찾아보며 마음속에 먹먹함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선명한 아픔이 되살아났다. 책 속 저자는 차가운 위령비 앞에 태극기를 펼치고 소주를 따르며 넋을 위로한다. 하지만 그 뒤를 지키는 현지인의 우호적이지 않은 시선과 지금까지도 추도문을 거부하는 도쿄지사의 태도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의 시계가 멈춰 있음을 실감케 했다. 추모비 옆에 적힌 '한일 양국 국민의 영원한 우정'이라는 문구는 사실에 대한 인정과 진심 어린 사과가 선행되지 않는 한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찬란했던 청춘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낯선 땅에서 쓰러져간 그 자리에 필요한 것은 은폐가 아닌 진실이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단순히 아픈 과거를 헤집는 것이 아니라 진실 위에 올바른 미래를 세우는 과정이다. 아이의 문제집 한 문장에서 시작된 이 배움이 우리 민족의 아픔을 넘어 인간의 정의를 생각하게 하는 여운을 남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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