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걸어가는 계절

겨울을 지나가다 - 조해진

by 레토

조해진 작가의 『겨울을 지나가다』는 엄마를 떠나보낸 한 딸이 남겨진 일상을 다독이며 다시 살아갈 힘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소설은 겨울 절기인 동지, 대한, 우수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어두운 밤을 지나 가장 추운 시기를 버티면 결국 얼음이 녹고 봄이 온다는 자연의 흐름을 담았다. 주인공 정연은 엄마의 부재 속에서 엄마가 남긴 공간과 기억을 붙잡고 서서히 다가오는 봄을 맞을 준비를 한다. 우리는 가장 힘든 계절 속에서도 결국 다시 살아가게 된다. 이 책에는 겨울을 건너는 모든 이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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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동지/冬至

p.13

잠든 엄마를 내려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사람의 몸은 시간이 담긴 그릇 같다고.

그렇다면 엄마의 몸에는 칠십일 년이 담긴 셈이다. 그 세월은 엄마를 아이에서 소녀로, 두 딸의 엄마로, 다시 할머니이자 암 환자로 변모하게 했다.

p.26

나는 엄마가 살고 싶어 한다고 늘 생각해왔으니까. 엄마 자신을 위해서 병원을 다니고 치료를 받는 거라고 믿었으니까. 실은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서 다만 버틴 것일 뿐, 대체 언제부터 엄마가 죽음에 투항한 상태였는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p.53

여기저기 군락을 이룬 갈대, 어딘가에서 왔다가 어딘가로 날아가는 새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그대로 쌓여 있는 돌과 바위를 나는 눈에 담았고 어두워지기 전, 정미를 데리고 발길을 돌렸다.

건강하시죠?

정미 집이 완성됐으니 언제든 전화 주세요.

메모지에는 그렇게 두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엄마의 시간을 다시 바라보다

1부 ‘동지’에서 정연은 엄마의 몸을 바라보며 그 안에 담긴 칠십일 년의 시간을 떠올린다. 아이였고 엄마였고 누군가의 사랑이었던 한 사람의 생 전체를 보려는 마음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연은 엄마가 죽음을 향해 조용히 마음을 내려놓은 순간이 이미 오래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동안의 치료는 엄마 자신의 생을 붙들기 위함이 아니라 남겨질 이들을 위함이었다. 겨울 들판의 풍경 속에서 정연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발걸음을 확인했다. 가장 길고 어두운 밤, 동지. 이별의 현실을 마주한 정연의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엄마라는 단어. 나에게 이 말은 때로는 듣기만 해도 마음이 아리고,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고, 또 때로는 답답해지는 감정을 한꺼번에 불러오는 단어다. 당뇨와 고혈압을 오래 앓아오셨고, 뇌출혈로 쓰러지신 적도 있는 엄마. 그런 엄마의 인생은 내 눈에 답답하게만 보였고 고집스러운 성격은 차마 이해할 수 없어 화를 내거나 마음대로 하라며 포기한 적도 있었다. 올해 초, 119를 부르고 경찰이 대동한 상황에서 집 문을 강제로 열어 쓰러진 엄마를 중환자실로 옮기던 순간,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엄마를 몰아세우지 말자. 그렇다고 너무 내버려두지도 말자.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 예전 엄마는 당뇨와 고혈압 환자임에도 끼니를 자주 거르고 약도 빠뜨리고 밤에는 떡으로 허기를 채우며 쉽게 잠들지 못하는 생활을 이어가셨다.


그런데 이제는 엄마도 스스로 크게 느끼신 것이 있는지 그리고 내가 잔소리 대신 챙겨드리려는 태도를 보인 덕분인지 아침 식사도 잘 챙겨 드시고 병원도 빠지지 않고 잘 다니신다. 요즘 마주하는 엄마의 얼굴은 한결 온화해졌다. 그래서 지금의 엄마는 나에게 든든함이다. 내 곁에서 누구보다 나를 걱정하고 살펴주는 사람. 그리고 엄마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일 것이다. 주인공 정연이 엄마의 마지막 겨울을 통해 비로소 엄마의 삶 전체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처럼, 나 역시 엄마의 시간과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는 중이다. 지금, 엄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 봄의 시작 같아서 감사하다. 우리가 함께 겨울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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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대한/大寒

p.61

“10월 초쯤에요. 그때 열흘 안에 완성할 수 있다고 해놓고서는 서울에 목공 수업 하나를 맡게 돼 계속 왔다 갔다 하느라……. 몇 번 전화를 드렸는데 안 받으시더라고요.”

p.67

엄마를 회피한 날이 더, 더, 많았다.

엄마의 병명을 안 뒤에도, 엄마가 치료를 중단하고 J읍에 내려온 뒤에도, 나는 내 일과 반복되는 일상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p.68

엄마가 투병하는 동안 나는 엄마의 현재에 내 미래를 투사하는 일에 더 성실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두려웠지만 멈출 수 없었다. 걷고 싶을 때 걷지 못하고 배설해야 하는 순간에 타인의 손을 빌려야 하는 내 노년을 상상하는 일은 떨쳐내려 해도 떨쳐지지 않은 채 끈질기게, 그야말로 질리도록 끈질기게 이어졌다.

p.79

“죽은 가족의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그런 거요. 보통은 버리거나 태우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착용까지 하는 거, 전 좋아 보여요.”

p.93

“그러니까, 엄마는 그런 사람이라고.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말할 것 같은 사람이랄까. 영화 속 대사처럼 말이야.”

“그러게, 생각해보니 엄마는 우리보다, 적어도 나보다는 가오가 있었네.”

“있었지, 넘쳐흘렀어.”


두려움과 사랑이 뒤엉킨 그날 밤

2부 ‘대한’에서 정연은 엄마를 향한 자신의 마음 깊숙한 어둠과 마주한다. 엄마를 회피한 날이 더 많았다는 사실, 엄마의 투병을 바라보며 자신의 노년을 떠올리고 두려움에 도망쳤다는 사실이 뒤늦게 밀려온다. 가장 혹독한 추위처럼 죄책감이 그녀를 꽉 죄어온다. 그러나 정연은 엄마의 옷을 입고 엄마가 남긴 작은 흔적들을 지우지 않으며 새로운 애도의 방식을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고집스럽게 보였던 엄마는 누구보다 강하고 당당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정연은 깊은 추위 속에서 겨울이 깊을수록, 곧 다가올 봄을 위한 바닥이 단단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정연의 마음 속 그 깊숙한 어둠을 나도 알고 있다. 엄마가 중환자실에 실려 가던 날, 구급차 안에서 엄마는 엉뚱한 말들을 계속 쏟아냈다. 상상 속에서 헤매는 듯한 횡설수설. 그 순간, 엄마를 먼저 걱정하기보다 나의 미래가 먼저 떠오른 마음이 스스로도 무섭고 낯설었다. ‘엄마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앞으로 나에게는 어떤 일이 찾아올까?’ 두려움이 뒤섞인 그날 밤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이 새벽에 나가신다고 고집을 부리신다며 상태가 좋지 않으니, 강제로 보호해도 되는지 동의를 구하는 연락. 억장이 무너졌다. 우리 엄마는 아직 젊은데, 엄마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다음날, 가능한 모든 검사가 진행되었다. 저혈당 쇼크와 높은 염증 수치로 인한 일시적 섬망. 다행히 뇌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의사의 말에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정연이 엄마의 현재에 자신의 미래를 비추며 두려워했던 것처럼, 나 또한 그 순간에 언젠가 내가 맞닥뜨릴 시간을 보았다. 두려움과 사랑이 뒤엉킨 마음, 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가족의 겨울을 지나가는 부끄럽게도 솔직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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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우수/雨水

p.107

정오 무렵엔 식당 문을 열어놓기 시작했다. 칼국수 요리에 재미가 붙은 데다 내 한 끼를 해결하고 싶어서였는데, 식재료를 다듬거나 반죽을 치대고 있노라면 한두 명씩 사람들이 들어오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p.111

엄마가 왜 노파를 알뜰히 챙겼는지, 그건 너무도 자명하게 알 수 있었다. 노파는 별말 없이 가만가만 음식만 씹고 삼키면서도 엄마 이야기가 나오면 웃곤 했는데, 그때마다 겹쳐지는 얼굴이 있었다. 주름에 눈꼬리가 파묻혀 실눈이 되는 얼굴, 그건 외할머니가 웃던 방식이었다.

p.114

운전석에서 내린 영준 씨는 나를 보자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부터 건넸는데, 그 안에는 바이올린처럼 옆선이 매끄러운 도마가 들어 있었다. 체리 나무로 만들었다고, 사포 작업에 공을 들이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그가 설명했다. 마치 일주일 동안 오로지 도마 작업에만 몰두했다는 듯이, 그래서 전화 한번 못 했다고 변명하듯이…….

p.127

영준 씨가 나간 사이 나는 들고 온 가방을 깔고 앉고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타오르는 촛불을 응시했다. 초에서 시선을 돌리지 말라는 부탁이라도 받은 사람마냥 집요히……. 엄마, 하고 나는 오랜만에 엄마를 불러보았다.

p.132

어제 정미와 걸었던 둑길에서도 디졸브되는 화면처럼 닫혀가는 겨울과 열리는 봄을 목격했다고 나는 영준씨에게 말했다. 둑길에 쌓인 눈은 남아있거나 녹아 있었고 둑 아래 작은 천은 살얼음을 띄워놓긴 했지만 그 주변이 거의 다 해빙되어 있었다고도.


겨울을 지나 다시 맞이할 봄

엄마가 입원해 있던 날들은 참으로 추웠다. 바람은 매서웠고 마음도 얼어붙어 있었다. 엄마가 입원한 기간 나는 우리 집과 병원, 엄마 집을 오가며 엄마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정비했다. 묵은 짐을 모두 정리하고 도배도 새로 했다. 갖고 싶어 하셨지만, 공간이 정리되지 않아 들일 수 없었던 리클라이너 쇼파도 집 정리를 하고 가구 배치를 바꾸니 충분히 자리를 예쁘게 잡았다. 오래된 가구들 대신 새 가구와 커튼으로 집 분위기를 바꾸어 엄마에게 다시 태어난 기분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 시간 사이 나는 난생처음 원형탈모를 겪었다. 내 마음에도 큰 부담이 짊어졌었나 보다. 500원짜리 동전만큼 비어 있는 두피가 어색하고 걱정되었지만, 병원에 다니며 빠르게 좋아졌다. 봄이 오자 엄마는 다행히 퇴원하셨다. 지금은 2주에 한 번씩 엄마와 함께 식사를 한다. 노래교실에서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 때로는 속상한 이야기까지. 예전 같으면 엄마의 말들이 내 안에 짐처럼 쌓였겠지만, 이제는 함께 해결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듣게 되었다.


정연이 엄마를 마음에 품고 다시 삶을 향해 걸음을 내디딘 것처럼, 나 역시 지금의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을 더 깊이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다. 겨울의 끝자락에 서 있다고 해도, 엄마와 함께 만들어가는 작은 변화들이 봄의 신호처럼 느껴진다. 얼음이 녹고 물이 흐르듯 우리에게도 다시 봄이 오고 있다. 다가올 겨울을 지나 봄을 향해 함께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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