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도망쳤던 모든 진심

애쓰지 않아도- 최은영

by 레토
20260309_100704.jpg
20260309_100720.jpg

소설집『애쓰지 않아도』는 최은영 작가님의 짧은 소설 14편을 엮은 책이다. 관계의 시작과 소멸, 그 틈새에 존재하는 미묘한 감정이 글에 담겨있다.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애쓰거나 관계를 유지하려 억지로 힘을 주던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들이 펼쳐진다. 친구나 연인, 가족 사이의 서운함과 죄책감 같은 복잡한 심리를 그리며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로 존재해도 좋다는 위로를 건네주었다. 작품 하나의 길이감은 짧았지만, 그 속에 담긴 생각의 깊이는 가볍지 않았다. 자극적인 사건 없이도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이 책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라는 온기 있는 공감을 선물해 줄 것이다.



20260309_100805.jpg
20260309_100755.jpg

애쓰지 않아도

p.16

내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내게 말을 건 건 그때였다. 키가 크고 눈웃음이 예쁘고 외향적인 성격으로 보이는 아이였다. 쉬는 시간에도 여러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며 인기 있는 애여서 나랑은 친해질 수 없으리라고 짐작했었는데. 그 애의 이름은 유나였다.

p.19

내 웃는 모습에서 슬픔이 보인다는 유나의 말을 나는 이후로도 내내 생각했다. 그 말이 마치 나만의 고유함과 특별함에 대한 유나의 인정처럼 느껴져서였다.

p.24

나는 유나에게서 내가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봤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돋보이고, 무엇보다도 힘이 있는 존재,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수동적인 위치에 처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애의 힘을 동경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p.29

그 이후 아는 내게 손을 흔드는 유나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맞은편에서 유나의 모습이 보이면 유나가 나를 이미 보고 있는 상황이어도 등을 돌려 다른 길로 갔다. 유나도 유나였지만 그런 유나를 진심으로 믿고 좋아했던, 더 가까워질 수 없어 안타까워하던 과거의 아는 용서하기가 어려웠다. 그래, 넌 날 우습게 봤어. 네가 나보다 잘았으면 얼마나 잘났길래 사람 마음 가지고 놀아? 유나에게 느꼈던 선망은 내 오래된 열등감의 다른 말이었다. 나는 유나를 증오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p.32

영원히 용서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유나에 대한 나의 마음은 그게 어떤 모습이든 늘 과하고 넘친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이제 애쓰지 않아도 유나를 별다른 감정 없이 기억할 수 있다. 아마 영원히 그 애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알고 싶다. 유나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 애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선망이라는 이름의 열등감

처음에는 단순히 친구와의 절교를 말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초점은 달라졌다. 주인공이 유나에게 느꼈던 감정은 순수한 우정이라기보다 내가 가지지 못한 자유로움과 힘에 대한 갈망이었다. 유나의 인정 한마디에 특별함을 느끼고 그 아이의 외향적인 에너지를 동경했던 마음은 사실 주인공 내면의 결핍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유나를 증오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유나의 잘못보다는 그 애를 간절히 원했던 과거의 자신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나에게 느꼈던 선망은 내 오래된 열등감의 다른 말이었다는 고백. 이야기의 핵심이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애쓰지 않아도’ 그 애를 무심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된 주인공의 상태는 용서나 화해라기보다는 치열했던 자아의 성장 끝에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 체념 섞인 평온에 가까웠다.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어느 누구나 자신의 곁에 ‘유나’ 같은 아이가 한번쯤 있었을 것이다. 정답이 정해진 교과서와 엄격한 규칙 속에서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 믿었던 나에게 아무에게나 쉽게 말을 걸고 환하게 웃으며 교실의 공기를 주도하던 아이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갖지 못한 타인의 유연함과 당당함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 역시 주인공처럼 누군가의 사소한 인정에 나의 가치를 의존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40대가 되어 만난 이 소설은 그때의 그 치졸하고 뜨거웠던 열등감조차 결국 나를 형성하는 과정이었음을 말해주었다. 이제는 애쓰지 않아도 그 시절의 친구들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에게 휘둘렸던 서툴고 어린 나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유나가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이제 나 자신을 ‘애쓰지 않아도’ 긍정할 수 있는 지점에 서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20260309_100823.jpg
20260309_100812.jpg

꿈결

p.56

꿈에 잠식되는 잠을 자기 시작한 건 성인이 된 이후였다. 기질적으로 예민하기도 했지만 무슨 이유였는지 나이가 들수록 작은 스트레스에도 쉽게 지쳤다.

p.57

정민의 꿈에는 그리운 존재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오래전에 헤어진 윤이도 나오지 않았다. 꿈에 죽은 가족이나 반려동물이 나왔다고, 정말 꿈같지 않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정민은 그들이 부러웠고, 꿈이라도 좋으니, 환상이라도 좋으니 단 한 번만이라도 그리운 존재들을 만나고 싶었다.

p.61

우리 둘 다 우리를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고 생각해.

정민은 윤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넌 내게 솔직하지 못했어.

p.64

요즘 잠은 잘 자?

윤이가 묻는다.

9년 만에 보는데 꼭 최근에 만났던 사람처럼 물어본다.

그렇게 답하고 나자 정민은 윤이와 떨어져 있던 시간이 실감 나지 않는다.

p.67

지금 이거, 꿈이구나.

정민의 말에 윤이가 엷게 웃는다.

내 꿈 안이야,

그래.

하긴, 우리가 어떻게 만나.

우리는 네 꿈에서 자주 만났어. 알잖아, 꿈을 기억할지 말지는 너의 선택이었다는 가. 넌 깨어나기 전에 선택할 수 있었어. 그리고 매번 기억하지 않는 걸 선택했고.

그랬구나.

그랬어.

그랬던 것 같아.

응.

p.70

자리에서 일어나서 정민은 한동안 침대에서 걸터앉아 있었다. 알람은 10분 후에 울릴 것이었다. 아무리 생생한 꿈이라고 하더라도 꿈은 깨고 나면 유리창에 내려앉은 눈송이처럼 녹아 흘러내렸다.


기억하지 않기로 한 선택, 슬픈 방어기제

이 소설은 정민이 겪는 꿈을 통해 성인이 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정서적 피로를 이야기하고 있다. 정민은 왜 그토록 그리워하던 할아버지나 윤이를 꿈에서조차 만날 수 없었을까? 소설의 반전은 그녀가 그들을 만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만났지만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했다’라는 사실에 있었다.


꿈속에서 만난 윤이는 정민에게 ‘넌 내게 솔직하지 못했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단순한 연인 사이의 거짓말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했던 정민의 방어적인 태도를 비추었다. 너무 아픈 기억은 아예 없었던 일처럼 지워버려야만 일상을 살 수 있었던 정민의 망각은 그녀가 얼마나 깊은 슬픔을 견디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깨어나면 녹아버리는 눈송이 같은 꿈일지라도 그 순간마다 정민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움을 밀어내고 있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작은 스트레스에도 쉽게 지친다는 정민의 고백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특히 40대라는 인생의 중반부에서 가정을 돌보고 일상을 꾸준히 유지해야 하는 위치에 서면 종종 나의 감정에 솔직해질 기회를 놓치곤 한다. 물리학의 법칙처럼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르듯 낮 동안 억눌렀던 감정들은 밤이 되면 꿈이라는 형태로 우리를 잠식 해온다.


나 역시 가끔 꿈에서 깨어나면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다. 분명 누군가를 만났거나 중요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안개처럼 흩어져 버린 기분. 어쩌면 정민처럼 그 기억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망각 버튼을 눌렀던 것일까? 설령 기억하지 못하는 꿈일지라도 그 안에서 나는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고 나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애쓰지 않아도 언젠가는 그 꿈 조각들이 완전한 위로로 다가올 날이 있을 것이라 믿어본다.



20260309_100840.jpg
20260309_100847.jpg

무급휴가

p.194

어느 날 같이 사는 언니 중 한 명이 미리에게 그런 말을 했다.

부부 싸움하고 매번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 먼저 죽는대.

그 말을 듣고 미리는 열 번을 싸우면 여덟 번은 먼저 사과하던 현주를 떠올렸다. 미리야, 미안해. 마음 풀어. 미리는 먼저 죽는 사람은 현주가 아니라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든 날 꿈에 현주가 나왔다. 꿈에서 현주는 춥고 어두운 밤에 외투도 없이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p.204

현주는 비밀스럽게 작업했지만 남자 친구에게는 자기 작품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았다. 현주는 미리에게 남자 친구가 객관적인 시작으로 조언을 해준다고 했다. 미술에 대해 아는 것이 많고 그림을 많이 봐온 사람이어서 믿을 만하다고 했다. 그 믿을 만한 비평이라는 것이 현주가 지닌 장점을 깎아내리고 비틀어 모멸감을 주는 것인지 그때의 미리는 알지 못했다.

p.205

시간이 지나면서 미리는 왜 그가 현주에 대한 거짓 소문을 지어 퍼뜨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현주 너는 복잡하고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고, 넌 그저 그런 여자라고, 아니, 그저 그런 여자여야 한다고. 현주의 모든 역사를 지우고, 개성을 지우고 그녀만의 특별함을 지우려는 말.

그가 퍼트린 가십으로 덧칠된 현주는 더 이상 고유한 한 인간도, 작가도 아니었다.

p.213

미리는 늘 자신의 문제로부터 도망쳤고,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자신의 분노로부터, 불안으로부터, 슬픔으로부터 도망쳤고 최대한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 대신 미리는 일에 몰두했다.

p.218

“난 네가 나는 용서하지 않을 줄 알았거든.”

“그때의 그 말들은 진심이 아니었어. 그냥 널 상처주고 싶어서 못되게 굴었던 거야.”

“알아, 그냥 그러고 싶을 때가 있잖아. 견디기가 힘들 때.”

“그래.”

“난, 네가 힘들 때 늘 너를 더 힘들게 했었던 것 같아.”

현주가 미리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p.221

최악의 인정 욕구는 자기 아픔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일지도 몰랐다.

미리는 현주에게 기대했고, 타인에게 기대하고 다시 상처받은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현주에게서 도망치는 것으로 자신에게 벌을 주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의식적으로는 현주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서는 알고 있었으면서, 현주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현주에게서 도망쳤다는 사실을.


지워진 고유성과 도망친 생존자

이 작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현주 남자 친구의 비평이었다. 비평이라는 이름을 달고 실체는 달랐던 그의 언행. 그는 현주의 예술적 개성을 객관적 조언이라는 가면을 쓰고 깎아내린다. 작가는 이를 ‘현주의 역사를 지우고, 특별함을 지우려는 행위’로 표현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명목하에 그 사람을 그저 그런 존재로 격하시켜 통제하려는 가스라이팅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미리는 결국 현주를 떠났다. 미리는 자신이 현주에게 버림받았다고 믿고 싶어 했지만, 사실은 도망친 것이었다. 자신의 불안과 슬픔을 직면하기보다 일에 몰두하며 도망치는 미리의 모습은 감당할 수 없는 감정 앞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가장 흔하고 가엾은 방어기제였다. ‘최악의 인정 욕구는 자기 아픔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는 고백은 우리가 왜 서로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서운함을 느끼고 갈등하는지에 대한 답이 되어주었다.


자연의 법칙과 다르게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의 힘은 그 방향이 참 모호하다.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 이 농담 같은 말은 관계에서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배려하는 사람이 짊어져야 할 정서적 압박을 의미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나 역시 수많은 ‘현주’들을 곁에서 떠나보냈고 혹은 내가 그들로부터 도망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았다고 분노하며 그 관계를 끊어냈을 때, 사실은 내 자신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내가 먼저 도망친 것은 아니었을까?


가정주부로 살아가며 때로 나만의 고유함이 일상이라는 무채색 아래 지워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나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을까? 혹은 누군가에게 아픔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최악의 인정 욕구’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을까? 내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내가 타인으로부터 도망친 사실을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다면 그때는 ‘무급휴가’ 같은 일상의 정지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고유한 존재인 나로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20260309_100856.jpg
20260309_100923.jpg


#최은영 #애쓰지않아도 #마음산책 #소설집 #북리뷰 #독서기록 #책추천 #한국소설 #관계의미학 #40대일상 #주부의삶 #고유성 #나다움 #열등감 #방어기제 #위로 #공감 #물리학적통찰 #마음공부 #꿈결 #무급휴가

월요일 연재
이전 13화엄마와 함께 걸어가는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