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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식공장장 Mar 21. 2018

왜 소년점프는 안 팔리는 책이 되었나?

경영진이 콘텐츠에 잘 못 손대면?

http://narsass.tistory.com/476


1. 일본에는 기네스북에 오른 잡지가 있어요. 바로 슈에이샤(集英社)의 '주간 소년 점프(週刊少年ジャンプ)'로  드래곤볼, 슬램덩크, 유유백서 등의 히트작이 나온 잡지로 유명합니다. 이 잡지가 1995년, 이 만화들이 연재될 때 추가 물량까지 포함해서 653만 부를 찍어 화제가 되었고 가장 많이 팔린, 인쇄된 잡지로 기네스북에 올랐죠.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앞으로도 깨질 일이 없겠죠.


이렇게 일본에서 독보적인 '소년 점프', 지금 판매량은 처참합니다. 2017년에 집계된 판매량은 1/3 정도로 추락한 191만에 불과해요. 이에 소년 점프 편집부는 이는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인한 것이며 다른 미디어가 공통적으로 겪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게 과연 사실일까요?



2. 일본 원서를 읽게 된 계기가 '드래곤볼'을 읽기 위해서였고 슬램덩크, 유유백서가 인생 만화일 정도로 저는 점프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본 게 '원피스'죠. 


[출처 : 원피스]

이 장면에 훅 가서 23권까지 샀다가 26권의, 사람들이 지루하다고 입을 모으는 하늘섬 편 때문에 질려서 점프 만화에서 조기 졸업을 하고 말았죠. 이후 한참 동안 점프 만화를 안 보다 '데스노트', '바쿠만'으로 다시 만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이 변화에서 묘한 것을 눈치챘습니다.


3. 점프 만화의 주요 이념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정, 노력, 승리. 점프는 이 세 가지 요소가 들어간 만화만 낸다는 거죠. 그런데 점프가 침체기를 겪고 난 후 연재를 시작한 만화에는 이런 요소가 없어요. 


'데스노트'가 왜 인기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 만화는 우정, 노력, 승리가 주요 3요소인 점프에서 연재되었지만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주인공 라이토는 우정, 노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 결국 패배하게 되죠. 


혹자는 '두뇌싸움'이 노력이라고 말하지만 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7권에서 L이 죽고 난 후 후계자들이 나오자 이 만화는 두뇌싸움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하지만 후반까지 준수한 인기를 유지했죠. 


데스노트가 인기를 끈 이유는 타인의 생명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처단하고 싶은 욕망이 있던 거죠. 달리 말하면 우정, 노력, 승리는 단순한 마케팅 용어일 뿐, 점프의 매상에 기여하는 가치는 아니라는 겁니다


4. 점프가 한창 잘 팔리던 버블경제, 버블경제 말기 세대, 편의상 1세대로 칭하죠. 1세대는 대기업에 다닐 경우 월급이 1천만 엔 (농담이 아니라 대기업 사원들이 직접 인증까지 해줬음)을 넘고 매일 호텔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해도 돈이 넘쳐나는 시대였죠 (이 모습은 만화 '20세기 소년'에서 오쵸의 회상을 통해 묘사됩니다). 


이후 2세대는 버블이 끝난 후의 세대입니다. 부모들만큼의 경제적 혜택은 얻지 못했지만 전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인프라와 부모의 지원을 통해 나름대로 유복한 생활을 하 수 있었죠. 부자는 망해도 3년 먹고 산다죠?


하지만 이런 트렌드가 3세대, 80년대 초반생~90년대 초반생까지 바뀝니다. 이 세대는 하락기를 직접 경험하고 이에 영향을 받은 세대예요. 앞의 두 세대와 다른 운명을 걷습니다. 


1세대는 내 집 마련이 문제없었고 2세대는 30~60년 융자를 당겨서 집을 지을 수도 있었고, 내 집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3세대는 이게 힘든 사회예요. 대출 상품에선 주택 관련 상품이 사라지고 내 집을 가져야 한다는 희망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저출산이 이런 상황 때문에 발생했죠.


그리고 지금 4세대에는 이것이 절정에 달합니다. 3세대인 지인들 왈 '우리보다 못 벌어' 세대입니다. 보통 한국 기사에는 일본의 호경기만 보도하는데 실상만 따져보면 초봉은 22~24만 엔에서 16~20만 엔으로 내려갔는데 물가는 (일본 기준에서)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에게는 노력해서 승리한다는 인식이 없어요. 4세대는 3세대의 부모세대, 윗세대가 죽어라 노력해도 근근이 연금 타서 겨우겨우 연명하는 걸 본 세대입니다. 


이런 세대에게 우정, 노력, 승리를 강조한 만화는 팔리지 않죠. 



5. 그래서 이런 갑갑한 현실에 절망한 세대에게 이렇게 초인적인 힘으로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만화가 인기를 끕니다. 예를 들어 '아쿠메츠'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자로 惡滅이라고 하죠. 악을 멸한다. 이 만화는 부패한 정치가와 기업인을 물리력으로 처단합니다. 스토리가 꽤 개연성이 없는데 이것 하나만으로 큰 인기를 모았죠.


최근 콘텐츠의 핵심에는 욕망 추구를 방해하는
 장벽에 대한 저항이 있습니다.


최근 망해가는 점프를 살려준 '약속의 네버랜드'의 소재는 자신들을 식용으로 쓰려는 귀신들에 대한 저항이 있습니다.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진 귀신들에게 저항하는 것을 통해 쾌감을 느끼죠. 


이는 일본 콘텐츠 전반적인 트렌드일지도 모르겠습니다(물론 한국의 웹툰에게도 통용됩니다). 심지어 점프가 아닌 매체에서 히트하는 작품들도 그래요. 대표적으로 '메이드 인 어비스'는 그림체는 한 없이 귀엽지만 내용을 파보면 자신들을 속박하는 억압적인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그 억압과 왜곡된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가는 내용입니다. 작품은 한없이 어둡고 우울하죠.


그림과는 달리 우울한 작품입니다 [출처 : 메이드 인 어비스]

점프에서 히트한 만화들은 우정, 노력, 승리로 포장할 수도 있지만 사실 따져보면 욕망을 잘 대변한 만화이기도 합니다.

 

바쿠만 : 일개 고교생이 연 수억 엔을 벌어들이는 부자가 되고 착하고 예쁜 부인까지 얻는 이야기

슬램덩크 :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초짜가 강호들도 인정하는 바스켓맨으로 성장하는 이야기

원피스 : 시골에서 아무것도 없는  <바보 소년>이 해적왕으로 성장하는 이야기

로쿠데나시 블루스 : 맘에 안 드는 건 다 두들겨패버리는 이야기, 심지어 교사마저.

시티헌터 : 잘생긴 데다 못하는 게 없는 주인공이 여자의 인기도 얻고, 좋은 파트너도 얻고 승승장구하는 이야기 


즉 점프의 만화는 한창 성장기의 독자(주 타겟층)이 되고 싶은 것을 그대로 반영함으로써 욕망을 충족시켰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6. 그런데 이 패턴은 사회의 변화, 세대의 변화로 인해 바뀌었죠. 노력하면 승리할 것이라 믿었던 세대는 그 믿음에 배신당하고 이제 노력해도 별게 없다는 세대가 주 세대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세대는 고생해서 집을 사는 게 더 싸지만 직장도 불안하고 수입도 불안정해서 월세가 편하다는 세대거든요. 


문제는 소년 점프를 편집하는 슈에이샤입니다. 이미 그들이 미는 패턴은 통하지 않아요. 한때 점프를 성장시킨 에너지가 넘치는 편집부는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절망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픈 욕망을 그린 만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만화를 내밀어도 편집부는 우정, 노력, 승리만을 내세우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패턴이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같은 슈에이샤가 출판하는 '종말의 하렘'입니다. 인류에서 남자가 멸망, 여자들만 있는 사회에서 남자들은 여자들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즉 남자들의 욕망을 제대로 대변한 작품이죠.


홍보조차 안했지만 그 돌풍은 무시무시했다 [출처 : 종말의 하렘]


종말의 하렘은 원래 점프 연재로 기획했지만 편집부는 내용상 점프와 안 맞고 수익성도 없을 거라고 판단해서 웹에 무료로 공개하는 형식으로 게재했죠. 별로 홍보도 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배너 광고도 홈페이지에 잠깐 올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웬 걸요? 이 만화는 처음에 100만 부를 찍더니 2권째는 300만 부 3권째는 500만 부를 기록하면서 앞의 권들의 판매를 끌어올리는 만화계에선 드문 신화를 쓰고 있습니다. 보통은 1권이 잘 팔리고 2권 부터는 감소하거든요.


점프 경영진의 전략은 더 이상 독자의 욕구를 반영하지 못한다


저는 이렇게 중간 결론 내렸습니다.


또한 이세계물이 과거보다 크게 히트하고 있습니다. 현실세상이 싫다는 반증이죠. [출처 : 천공의 에스카 플로네]


7. 기업은 한 번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했는데 그게 성공하면 잘 바꾸려고 하지 않아요. 조직인에게 이는 굉장한 모험이 됩니다. 특히 일본 회사는 이게 심합니다.


샤프가 망한 이유는 이미 전 세계에서 액정패널 시장이 사양세로 들어서고 있는데 액정패널에 올인하고 투자하다가 결국 중국 홍하이에 넘어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도시바는 다른 사업을 모두 접고 레드오션인 메모리에만 투자하다가 메모리 값 폭락에 힘입어 분식회계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접었던 사업들은 여기저기서 대박들이 났죠.


경직된 일본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회사의 방향타를 돌리는 '배신'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점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과거의 점프를 성공으로 이끈 편집자는 점프 성장의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191만부요? 아마 장기 작품인 원피스와 헌터헌터가 끝나는 순간 와장창 무너질겁니다.



8. 저는 


콘텐츠에는 도전이 필요하며 경영진은 이들을 공식과 전략으로 억누르면 안 된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미 세상은 변해서 현실 탈출의 욕구를 부르짖고 있는데 시대를 반영하지 못하는 편집부 = 경영진이란 사람들이 나서서 그들의 창작욕을 컨트롤하려면 되겠습니까?


현재 점프에 남아있는 만화 중, 성공작은 원피스, 헌터 헌터, 약속의 네버랜드뿐이며 앞의 두 작품이 장기연 재임을 감안하면 최근의 히트작은 오히려 점프의 기본에서 벗어난 것이 더 뜨고 있습니다. 실패사례를 보면 점프의 방식이 더 안 통한다는 이야기도 되겠죠.


원석을 발굴해서 그 원석의 가치를 드러내 주는 사람은 필요하지만 
원석을 발굴해서 성격이 다른 잘 팔리는 원석처럼 포장하는 사람은 있어선 안된다. 


물론 작가에게 너무 전권을 주면 비즈니스에서 벗어난 작품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콘텐츠 제작자를 너무 통제해서 되나요? 이미 세상은 변화하고 있는데 변하지도 않은 채 말이죠.


저는 점프가 이 이상 안 팔리는 사태를 막으려면 기존의 성공방정식에 맞춰 작품을 재단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 작품에서 시대의 트렌드와 히트 요인을 읽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를 잘 알고 있겠지만요. 


결국 사람들은 콘텐츠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킵니다. 이것이 기본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역사 리더십 경영 매거진의 테마를 바탕으로 새로 엮어낸 <조선 리더십 경영> 이 와이즈베리/미래엔에서 2018년 11월 하순 출간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메일 : inswrit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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