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산업의 본질은 컨텐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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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장을 뒤흔드는 빅이슈라면 VR(Virtual Reality)을 들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 관련제품이 많이 나온데다, 스마트폰 중에서도 VR을 제대로 지원할 스펙을 지닌 제품이 나오면서 VR시장은 소비자들에게 그 이름을 각인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에 게임, 교육, 엔터테인먼트에 관련된 여러 기업들이 VR관련 시장에 진출할 것을 발표하기도 했죠.
일반 소비자들은 왜 나온지 얼마 안된 시장에 기업들이 뛰어드는 걸 보니, VR이 정말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VR관련 글을 쓴 시점은 2015년, 그리고 그 글이 쓰인 시점도 관련 제품이 나온 후에 쓰인 글이죠. VR관련 제품이 시장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전이니 VR이 소매시장에 얼굴을 드러낸 것은 거의 3년이 다 되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선 VR이 일반 소비자들에게 잘 받아들여졌는지, 과연 미래는 밝은지 좀 더 현실적으로 따져봐야 할 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장을 보면, VR은 아직 제대로 피기는 커녕, 불안한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3D처럼 VR시장은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1. 어떤 매체가 보급될 때는 매개체가 필요한데 디지털 산업에서 보급속도가 빠르고 영향력이 큰 매체라면 바로 게임, 영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VR의 문제가 바로 드러나게 됩니다. VR이 뜨려면 지금 나온 게임들이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매개체가 되어야 하는데, 현재까지 출시된 VR게임들의 문제는 테크데모 이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플레이 타임은 바이오 해저드 7을 제외하면 1시간 미만에 불과합니다. PSVR의 동시 발매작으로 기대를 모았던 <섬머레슨>은 뭔 쇼를 다 해도 플레이시간이 30분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정도 길이는 하나의 콘텐츠를 즐기는 게임이라기 보다는, VR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주는 테크 데모 (Tech Demo)에 불과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 테크 데모는 체험을 하기 위한 것이지 플레이하기 위한 것은 아니죠. 즉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물건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게임사들은 한 가지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테크 데모 수준의 제품이 아닌 제대로 된 게임과 VR을 접목시키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쉬운 시도는 아닐겁니다.
왜냐하면 VR이라는 콘텐츠는 지금까지처럼 디스플레이로 즐기는 체험이 아닌, 플레이어를 공간에 밀어넣는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게임의 재미요소를 주기 위한 기획부터 조작방법까지 기존과는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존과 다른 형태의 콘텐츠가 경영진의 승인을 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불행중 다행인 것은, VR이 소비시장에 모습을 드러낸지 3년만에, 이 딜레마를 해결한 타이틀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바이오 해저드 7>입니다. 플레이시간도 3~4시간에 달하며, 게임 자체도 VR을 빼고 놓고봐도 하나의 훌륭한 작품으로써의 완성도를 갖췄고, VR을 활용할 경우 전에 없던 공포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없던 경험을 준다는 VR의 취지와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매력을 동시에 지닌 게임이 처음으로 나온 것이죠.
2. 새로운 플랫폼의 성공에는 그 기기를 돋보이게 하는 매개체인 킬러 콘텐츠가 있었습니다. 저는 바이오 하자드가 일반인 지향의 VR 콘텐츠 중에서 최초로 이 킬러 콘텐츠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고 있어요. 다만 문제는 킬러 콘텐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이 킬러 콘텐츠의 상업적 성과를 바탕으로 시장에 뛰어드는 후발주자가 지속성을 이어줘야 시장이 움직이기 시작하거든요.
하지만 현재 발매예정인 작품들을 보면, VR을 위해 만들어진 제대로 된 콘텐츠는 보이지 않고, 기존의 콘텐츠에 VR을 접목시킨 작품들이 몇개 보일 뿐입니다. 개중에는 결과물이 기대되는 작품이 있고, VR만 가져다 쓴 수준의 작품도 있는데 이 흐름대로 가면 VR의 전성기는 적어도 2018년 3분기 이후에나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VR시장이 살아남는다는 전제하에 말이죠.
1. 영화 <아바타>는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전에 없던 충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3D관련 기술이 시장에 등장한 건 80년대 초였음에도 2010년이 되기까지 거의 30년 동안 3D의 매력을 느끼게 한 콘텐츠는 시장에 등장하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아바타는 이 벽을 깼습니다. 영화에서 화면에 소이탄이 날아올 때 몸을 움츠린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닐거에요. 영화를 보면서 콘텐츠가 3차원에 영향을 준 건 이게 최초가 아닐까요?
이후, 한국 시장에선 3D가 주력 산업으로 떠올랐고, 제조사, 콘텐츠사가 3D관련 시장에 뛰어들었죠. 그런데 그 과정이 심히 핀트가 벗어난 것이라 저같이 게임, 영화, 만화를 많이 본 사람들은 이 산업이 오래가지 못할 것을 예측할 정도였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콘텐츠의 설계가 잘못됐습니다. 아바타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까지 계산한 연출을 보여준반면, 다른 콘텐츠들은 화면이 튀어나오는 것 이상을 보여주지 못했어요. 그리고 이를 홍보할 전략마저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3D 시장에는 3D요소가 관객에게 영향을 주는 콘텐츠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런 콘텐츠는 한손에 꼽을 정도로밖에 나오지 못했죠.
이후 3D를 만드는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어갔고, 결국 3D TV생산중지라는 비운마저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 현재 VR관련 영상 콘텐츠는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VR을 하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전에 없는 새로운 체험을 기대할텐데 콘텐츠는 그냥 스카이 다이빙을 하고, 공중그네를 하고 있죠. 이 정도 체험은 VR을 살 돈보다 싼 값에 즐길 수 있습니다. 신기한 체험이 될 지언정, 이 체험을 위해 VR을 구매할 요인은 되지 못하죠. 적어도 VR영상은 자신들이 만들어야 할 것이, 지금까지 소비자가 겪지 못한 이질적인 체험임을 아직 깨닫지 못한 듯 합니다.
그럼 희망은 게임에 걸어봐야 할텐데요, 사실 게임쪽도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위에 게임사들이 VR게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긴 커녕 1시간 이내의 테크 데모만 쏟아내고 있다고 했는데요, 사실 게임사들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못 내놓는 것에 가깝습니다.
아무래도 VR은 콘솔 게임의 영역에 가까운데, 시장은 스마트폰 등으로 다변화되었고, 게임의 제작비는 올라가서 제작비용은 올라가는데 소비자들은 고연령화되어 까다로워진데다, 어린 소비자들의 유입은 더디죠. 슈퍼 패미콤 시절만 가도 어지간한 게임은 20만장 이상을 팔았지만, 요즘엔 20만장 이상을 파는 게임이 드문 지경이 됐습니다. 제작비는 당시 대비 최대 5000배까지 올랐음에도요.
소비시장이 고급화되면 다양한 대중을 노리는 마케팅보다는, 세분화 된 타겟 시장을 노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을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현재 시장이에요. 게임이든 다른 업종이든.
소비시장은 고급화 되었습니다. 취향은 다양해지고, 원하는 결과물에 대한 기준도 높습니다. 하지만 여기 뛰어들기에는 너무 시장적 매력이 없다는 것, 게다가 보급마저 더디다는 것, 이것이 VR시장이 가진 딜레마입니다.
1. 저는 지금까지 VR시장에서 살아 남으려면, 어느 정도 완성도를 갖춘 콘텐츠를 정확한 타겟 시장에 투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럼 여기서 대체 어떤 시장이 VR을 원하는지에 대해 짚어봐야 할 겁니다.
저는 사람이 경험을 통해 즐기는 모든 콘텐츠가 그 대상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면 가뜩이나 길어지는 글이 더 길어질테니 (제가 요즘 짧게 쓰려고 엄청 노력하고 있습니다) 딱 줄여 두 가지만 적어보겠습니다.
하나는 공포지요. 공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 감정중에서도 특히 오래된 것이고, 가장 익숙한 감정이나 항상 느끼진 못하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가장 다양하게 활용하는 감정이기도 해요, 그 공포에서 벗어난 쾌감을 즐기는 사람, 공포에 떠는 사람들 보고 즐거워하는 감정 그리고 그 공포에 떠는 자신을 기대하는 감정.
이런 면에서 공포는 판매하기 좋은 상품입니다. 하지만 주력으로 할 수 없는 상품입니다. 공포를 즐기는 소비자는 확실하지만 규모가 작아서 소비재 시장의 주력 시장에 걸맞지 않아요.
2.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사실 VR시장에서 제일 확실하게 팔 수 있는 콘텐츠는 다들 아시듯 성(性)관련 콘텐츠입니다. 경험이 중심이 되는 콘텐츠인데다 즐기는 소비자수가 압도적이며 의외로 찾아보면 다양한 취향이 존재하는데, 가상현실에선 이를 다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장에 눈을 뜨고 행동으로 옮긴 것은 별명이 성진국이라는 일본입니다. 오래전부터 성인용 게임시장에서 VR이 대응되는 게임들이 나오고 있었고, VR환경에서 즐길 수 있는 성인 영상물이 제공되고 있었죠.
아무리 봐도 남코의 섬머레슨에서 따온 듯 한 일본 일루젼(Illusion)사의 <VR그녀>는 판매량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상업적 성과를 얻은 것인지 후속작인 <VR온천>의 발매가 결정되었죠(오큘러스 리프트, 바이브의는 출하량이 100만대니 1만장만 팔아도 대 히트긴 합니다).
3. 영상물의 경우 성인 영상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SOD사에서 성인용 VR영상을 볼 수 있는 VR방을 오픈했습니다. 현재 도쿄 아키하바라에 1호점이 오픈했고, 점차 확장한다고 하네요. 4시간을 줄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기사까지 뜬 걸보니 파일럿 매장으로썬 성공한 듯 보입니다.
공포, 성(SEX)는 VR시장에서 가장 팔기 쉬운 콘텐츠이자, VR의 매력을 제일 발휘하기 쉬운 콘텐츠이기도 합니다(여기에 굳이 하나 더 더하자면 전쟁(WAR)를 들 수 있겠습니다만 이것도 보급장벽이 만만치 않습니다).
다만 현재 시장을 보면 아직 걸음마 단계, 자동차를 만들었는데 사람보다 느린 산업혁명 초기같은 느낌입니다. 위에서 적었듯, 시도가 이루어지는 시기일 뿐, 결실이 맺어진 시기가 아니죠.
게다가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사는 한국에서는 더 문제가 심각합니다. 공포라면 이미 PS4로 <화이트 데이>가 VR대응으로 이식중에 있으니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성'은 대한민국 관련법상 제대로 된 사업을 시작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한데다, 설령 관련 규제가 전부 사라지더라도 대기업이 진출하기엔 어려운 분야라 시장 활성화에 장애가 발생합니다.
PS VR이 환경 구축에 거의 100만원, 오큘러스 리프트, 바이브가 180만원이 들어가는데, 시장 확장을 할 수단조차 제한적이라면, 한국 시장에선 확장에 난관이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사업준비중인 기업들이 성공적인 결과를 내더라도 후발 주자가 적절한 타이밍에 뛰어들어 시장 지속성을 유지시켜주지 못하면 앞으로 좋은 VR관련 신작 및 제품이 나오지 못하거나 발매텀이 길어지는 현상이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관련 기업이 서로 머리를 맞대어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런 추세로 가면 해외에서 조차, 테크 데모 수준의 콘텐츠가 남발하는 바람에 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VR은 한국에선 확실히 사장당합니다. 가뜩이나 드론 등의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한국에 이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면에서 볼 때 VR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다만 아직 포기하긴 이릅니다. 최근에 제가 받는 헤드헌팅 정보받는 것 중, VR어뮤즈먼트 사업에 관한 것들이 있는 걸 보면, 활성화에 관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는듯 하며, 한국 사람들이 제한된 환경에서 우수한 결과를 내는데 도가 튼 사람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 번 기대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VR에 뜻을 가진 기업, 개인들이 힘을 모아 VR시장의 안착 및 활성화를 위한 좋은 답을 찾아내길 기원하며,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
Key Point
1. 콘텐츠의 체험이 아닌 수에만 집착하면, 3D의 전철을 밟을 뿐이다. 체험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어라.
2. 데모를 넘어 완성도를 가진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시장에 투하되어야 한다.
3. 개인이든 협의체든 좋으니 지속적으로 시장에 콘텐츠를 제공할 방안을 만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