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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식공장장 Sep 06. 2017

즐거운 사라, 결말에 관하여

사회가 원했던 사라의 결말에 대하여

1. 어렸을 때는 좀 심할 정도로 다독가여서 토요일에는 내 명의 대출카드뿐만이 아니라 어머니 것까지 같이 들고 가 책을 읽고 주말을 불사르곤 했다. 그래서 20여 년 전 도서관 근처를 배낭 메고 다니는 아이를 봤다면 아마 나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성역 없는(?) 독서를 즐기다 보니, 거의 책은 자유분방하게 다뤘는데, 당연히 그때 접한 것 중에는 즐거운 사라도 있었다. 물론 금서가 되기 전의 이야기다. 독서노트를 뒤져보니 당시에는 그냥 반 호기심으로 읽었고 큰 인상을 받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이 책이 오늘날까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게 될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2. 1992년, 법원은 즐거운 사라의 작가인 마광수 연세대학교 교수에게 집행유예로 유죄를 선고했다. 당시 판결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반인의 성의식이 크게 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문학작품이 상세하고 노골적인 성애 장면을 실어 출판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동체의 성도의 관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소설 ‘즐거운 사라’는 온갖 변태적인 성행위와 불륜관계가 작품의 중추를 이루고 있어 문학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을 잃었을 뿐 아니라, 각종 성범죄를 유발하는 등 사회적 폐해도 적잖다. (당시 판결문에서 일부 인용)



당시에는 이런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 딱히 반론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이후에 이 판결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는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속칭 만화 때려잡기 운동이다. 


90년대 후반 YWCA가 국내에 출판 중인 만화의 유해성에 대해 제제를 걸었다. 만화의 표현이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에서 묘사한 원시시대의 원시인의 나체가 문제가 되어 작가가 검찰에 불려갔고, 아기공룡 둘리에서 둘리가 빙산타고 내려오는 것, 고길동이 둘리의 장난에 당하는 것이 악영향을 준다며 만화가 김수정 씨가 검찰에 소환되었고 심지어 드래곤볼에 나오는  '미스터 사탄'이 지구를 지킨 영웅으로 묘사되었다는 이유로 판매금지가 되었다. 게다가 어린 동생을 돌보는 형의 이야기를 그린 라가와 마리모의 '아기와 나'는 여자 동급생이 벌칙으로 미운 엉덩이라며 엉덩이를 툭 치는 것이 성추행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렇게 정부가 주도한 한국판 문화 대혁명이, 지금 보면 인터넷 허무 개그 수준으로 진행되었었다. 요즘 20대 초중반에게 이야기하면 아예 믿지를 않는다. 아저씨가 하는 개그 정도로 인식하는 모양이다. 


설마 그 정도였겠어요? 농담이 심해요라고. 차라리 개그였으면 좋았을 텐데.



3. 즐거운 사라의 내용을 간단히 묘사하자면


보수적인 한국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여대생 사라는
 다양한 만남을 추구한다.


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당시 서평에 있던 내용을 빌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문제가 되어 법정에 서게 된 것 자체가 희안하다. 당시 한국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도, 무라카미 류의 책도 버젓이 번역 출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키도 그렇다 쳐도 류의 책과 즐거운 사라의 묘사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관점과 묘사와 다르다고 볼 수 있을까? 당시 대본소에서 출간되어 만화방에 깔리던 성인 소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래서 그런지 당시에도 이슈가 된 모양이다. 표현의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의 항의가 이어졌는데, 이때 판사의 말이 걸작이다.


이 판결이 불과 10년 후에는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판사로서 현재의 법 감정에 따라 판결할 수밖에 없다


즉, 이 반응은 사회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사회가 이 소설을 용서할 수 없기에,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마광수 교수는 집행유예 2년의 유죄 선고를 받고, 교수직을 박탈당한다. 


4.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마광수 교수는 다시 복직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07년에 이 책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검찰에 약식기소를 당한 것이다. 이미 세상에는 한국에도 사라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글로 나타났다고 또다시 기소를 당한 것이다.  그리고 92년 판결의 영향으로 2016년 퇴임시 연금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즐거운 사라를 재출간하려고 해도, 고 마광수 교수가 유죄판결을 받아서 출간이 안되는 데다 지금 재심을 받으면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지만, 지금 교수님이 별세하셨으므로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예전에 검찰에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 <즐거운 사라>의 사라가 반성을 안 해서 유죄래. 미쳐 미쳐. 끝 장면에 사라가 ‘오늘도 먹잇감을 찾아 나선다’고 말하는데, ‘먹잇감’ 이 단어가 도마 위에 올랐어. 왜 이렇게 천박한 말을 썼느냐고.” (2015년 월간 중앙 인터뷰에서 인용)


참고로, 이 책 지금 중고 시장에서는 엄청나게 비쌉니다

이 책에 대해 언급한 이유는 한국사회가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제어했는지 상징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어린 나의 꿈을 키워줬던 아기공룡 둘리, 드래곤볼이 정부 주도로 불량만화가 되어 출간 금지가 되는 일을 겪은 입장에서 과연 표현의 자유, 정보의 차단이 의미 있는 일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었다. 만화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문학계에선 이런 회의를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즐거운 사라였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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