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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식공장장 Sep 25. 2017

청년들을 위한 영웅담

윤태호의 미생

1.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위인전의 끝 부분에는 '어린이 여러분들도 꼭 이 분과 같은 사람이 되세요'라는 희망을 가득 담은 말이 적혀있었다. 이 말은 저자가 어린이용 위인전을 집필한 의도이기도 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과 과가 있다. 하지만 어린이 위인전에 나온 사람들은 공은 있되 과가 없다. 어떤 사람이든 열심히 해서 잘 나간 사람들이다. 국가, 성별, 인종, 분야가 다를지언정 시련을 넘어 성공한 사람들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리수도 감수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한국의 위인들 (전 30권)의 연개소문 편은 '이렇게 고구려를 멸망시켜 새로운 정부를 세운 연개소문 장군은 이후로도 나라를 위해 봉사했다'라는 식의 멘트로 끝나 있었다. 이런저런 껄그러운 기록을 빼고, 쿠데타 영웅의 활약을 묘사했다. 페이지는 30페이지가 안됐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뻔했다.


위인전은 본명이 뭔지, 어떻게 죽었는지 같은 그 인물의 삶을 전체적으로 분석할 소재를 제공하지 않는다. 어른이 원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교재에 불과하다. 때로는 교재적인 완성도가 너무 뛰어나서 희망이 꺾일 지경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삶은 못 살 것 같은 것이다. 완벽한 인간에게서 희망을 찾으라는 건 본인이 완벽해지는 것보다 더 힘들 것이다.


2. 윤태호 화백의 대 히트작 '미생'을 읽으면서 특이하다고 느낀 것은 이야기를 만드는 소재가 이질적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우선 작가는 회사 생활을 해 본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철저한 취재를 바탕으로 직장인들이 크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끌어냈다. 단순히 이야기를 쓴 것만이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들 간의 갈등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단순한 취재가 아니라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까지 그대로 담아내는 놀라운 현실성이 있다.


그 현실성은 때로는 잔혹하게까지 보인다. 장그래는 사장의 눈의 들 정도의 활약을 했음에도 정규직이 되지 못한다. 정규직이 천시함으로써 우월감을 느껴야 할 계약직이 정규직이 되는 순간 조직의 갈등이 시작되는 어이없는 계급제의 현실까지 반영한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 계약직도 열심히 하면 정규직이 된다는 판타지는 철저히 배제된다.


그런데 이 철저한 현실 속에 '판타지'가 들어있다. 바로 오 과장이라는 사람이었다. 화내고 분노할 때는 올바르면서 철저히 화내지만 평상시에는 권위주의를 버리고 팀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진지하게 듣고 팀으로 움직인다. 게다가 사람들이 일까지 버리면서 고르는 사내정치와는 선을 긋는 우리들이 그렇게 꿈에 그리지만 만날 수도 없고 될 수도 없는 사람이 바로 오 과장이다. 


이 오 과장이라는 판타지가 있어서 장그래는 영웅적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3. 조직에서 상사와 부하 간의 벽이 왜 생길까? 보통 상사들은 부하직원들과 아이돌 그룹 이야기도 하고, 유행하는 드라마 이야기도 하면서 본인은 그들과 눈높이를 맞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진정한 소통이 아니다. 그들은 아이돌, 드라마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들이 세운 문화에 부하직원들이 맞춰주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내근직이라도 슬리퍼를 못 신고, 냉방이 아무리 안 좋아도 와이셔츠를 걷어붙이거나 넥타이를 풀 수 없다. 심한 경우에는 사적 영역으로까지 번진다. 친구의 몇 년 전에 이직한 어떤 회사에는 부하직원은 상사보다 좋은 차를 끌고 다니면 안 된다는 암묵지가 있었단다. 그 친구는 그렇게 아끼던 BMW 미니를 팔아야 했다. 어제 만난 친구는 상사의 스마트폰이 구형이라 자기도 몇 년째 바꾸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상사들은 본인들의 기준에 맞춰주기를 바란다. 업무를 위해서일 수도 있고, 권위를 위해 서일수도 있고 좋은 의도일 수도 있고 쓸데없는 의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아래의 의견이 위로 올라가는 건 보통일이 아니다. 하지만 오 과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의 말도 끝까지 듣고 대안을 찾는다. 


그래서 오 과장은 판타지다. 그가 환상 속의 인물이 아니면 장그래의 말을 듣고 부당 편취를 하는 박 과장을 잡아내거나, 요르단 자동차 산업을 재발굴하지 못했을 것이다.


4. 장그래를 둘러싼 현실은 각박하다. 그는 역사 속의 사람들처럼 거대한 국가를 세우거나, 역사에 남을 장인이 되진 못할 것이다. 현직 인사팀, 헤드헌터가 절대 안 뽑을 인물로 분류되는 한계가 존재한다. 무언가를 이루긴커녕 기회를 얻는 것 자체가 힘들다. 


하지만 이런 판타지 덕에 30도 안된 청년은 완성된 통찰력으로 많은 난관을 해결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의 삶을 완생으로 이끌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낼 것이다.


5. 그래서 난 이 미생의 장그래가 윤태호 작가가 요즘 청년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만들어내기 위해 편집해낸 영웅이 아니라, 우리가 될 수밖에 없는 젊은 사람을 제시해서 이 시대에 올바른 영웅을 제시했다. 


요즘 사람들은 영리하고 분석적이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그려준 환상에 전율하고 감동하지 않는다. 자신의 현실과 비춰 분석하고 냉정한 현실에 반영하는 지식과 지혜가 있다.


장그래의 고행이 이 시대 젊은이들의 영웅담이 되는 이유다.  


ⓒ 2013 윤태호/누룩미디어/위즈덤하우스/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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