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리더십 경영
조선 왕 중에서 성격 괴상한 사람들 중 탑을 꼽자면 연산군과 영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연산군이야 말할 것도 없고, 영조도 만만치 않다.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는 바람에 좋은 이미지를 싹 날린 왕이다. 우리는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각종 사극, 최근에 개봉한 영화 '사도'등을 통해 그의 괴팍함을 잘 알고 있다.
영화 <사도>에서 봐서 익숙한 사람이 요즘은 많은데 영조는 괴팍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굉장히 학식 높은 학자에다 노련한 정치가로 초기에 불안한 왕권을 강력하게 구축할 정도로 수완가였지만, 정작 인간적인 면에선 성격도 급하고 감정의 기복이 굉장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사람 대하는 것도 이상해서 오죽하면 자기가 낳은 자식인데도 좋아하는 사람은 무조건 좋아했고, 싫어하는 사람은 정말 싫어했다. 보통 아들을 싫어하고 딸에게 껌뻑 죽었다고 한다. 급기야 자기 맘에 안 든다고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이 불행한 아들 <사도세자>가 영조가 원하는 군왕상이 아니어서 핍박받은 걸 생각해보면, 하지만 영조가 원하는 왕의 상이 아니었을 뿐 훌륭한 자질을 가졌었던 것을 감안해보면 굉장히 편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자기가 자식을 그렇게 키워놓고 맘에 안 든다고 죽이는 것은 아버지로서도 사람으로서도 실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영조를 군왕으로써는 최고인데 사람으로서는 좀 이상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한 정신과 전문의는 이런 성격이 '어렸을 때 출신성분의 문제로 어머니와 같이 지낼 수 있는 황금기 18~36개월을 놓쳐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라 일어난 비극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까다롭고 사람 가리고 정치력은 9단인 왕에게 대놓고 대들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박문수'였다.
박문수는 어려서 돌림병으로 부모를 잃고, 독신인 숙부 밑에서 자랐는데 이게 원인이 된 건지 소싯적에 주먹 좀 쓰셨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매진해서 33세에 급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당시 과거 성적은 그리 신통치 않아서 41명 중 26등으로 중하위권이지만 보통 업무능력과 성적은 비례하지 않는 법. 이후 그는 실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이 사람은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한데, 보통 그 이름 앞에 '암행어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가 암행어사로 활약한 건 몇 번 안되고 대부분은 어사로 파견되어서 민심을 수습하고 굶주린 백성, 억울한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워낙 일을 잘해서인지 성적이 하위권이었음에도 병조판서(국방부, 외교부 장관)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5년 정도였다.
이렇게 말하면 과거에 붙은 이후로는 승승장구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굴곡이 있는 벼슬 생활을 했다. 거의 탄핵 좌천 귀양은 풀코스로 겪어본 사람이다. 이는 그의 직설적인 성격이 한 몫했는데 보통 이상한 소리하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의 체면을 봐주느라 쉬이쉬이 넘어가지만 박문수는 자근자근 밟아주는 스타일이었다.
백성을 구하기는커녕 코 골며 잠자다가 권세들에게 아첨하기만 한다. (영조 8년 12월 18일)
백성들이 죽어가는데 문제점만 따지고 대책을 실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영조 9년 1월 27일)
이 나라는 노론과 소론의 나라이지 전하(영조)의 나라가 아닙니다. (영조 9년 12월 19일)
이렇게 직격탄을 날려대니 신하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자기 잘못을 지적당하면 자기가 잘못했다는 생각 이전에 지적당한 게 화나는 것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성, 당연히 집중포화가 이뤄졌다. 그 공격을 다 맞았으면 아마 박문수는 평생 한양 땅을 못 밟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박문수를 감싸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상 까탈스러운 남자인 영조였다. 영조의 신뢰는 이상할 정도로 두터웠다.
영조 13년, 영조는 박문수를 불러들여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한다.
경을 아는 사람은 경이 나라를 위한다고 말하고, 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경이 미쳤다고 한다. 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경의 말을 들을 것이다. 다만 경의 자질과 품성에 비해 학문이 부족하니 학문에 힘쓰면 좋겠다.
이 말을 들은 박문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저도 학문이 좋은 줄은 압니다. 하지만 지금 학문은 겉치레일 뿐이니 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신은 학문은 없어도 옛사람에 견주어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군왕이 학문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학문이 껍데기니 굳이 학문에 힘쓸 필요가 없느냐고 말대답을 한 것이다. 이를 조금 더 의도대로 해석하자면 '그래서 어쩌라고?' 가 된다.
보통 이렇게 생각해서 해준 말을 면전에서 반박당하면 기분이 상한다. 특히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점, 경종 독살 건으로 인해 약한 왕권을 강화하는데 집중했던 왕이라 왕권을 둘러싼 잡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왕이다. 박문수의 '그래서 어쩌라고? 식의 대답은 꼬투리를 잡으면 이런 잡음 부류에 들어갈 정도로 아마 광해군이면 당장 옥사를 벌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조는 이에 웃으며 답한다. '그래 경이 옛사람과 일치하는 겉 같긴 하다.'
사도세자의 비극이 강렬하게 각인된 사람들에게는 의외의 반응이다.
영조의 박문수 사랑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왕을 교육시키는 경연(이라지만 이 경우 신하들이 교육받는 상황)은 굉장히 엄격한 자리다. 거기서 일어난 한 가지 한 가지가 왕에 대한 교육이라고 간주해서 드나들 때 문을 제대로 안 닫아도 경위서를 쓸 정도로 살얼음판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박문수는
임금은 부모고 백성은 아들이라고 하는데 아들이 아버지 얼굴 보는 게 뭐 어떠냐.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코 처박고 아부나 떨지 말고 서로 얼굴 좀 보고 이야기합시다
면서 다른 신하들은 고개 숙이고 있는 마당에 혼자 꼿꼿이 앉아서 왕의 얼굴을 노려봤다. 참고로 저기서 '처박고'나 '아부 떨지 말고'라는 건 저자가 과장한 게 아니라 실록에 적힌 말 그대로 옮겨 적었으니 박문수의 평소 말투를 알만하다.
그런데 정작 반응이 재미있다. 까탈스러운 성격의 대명사 영조는 웃으면서 서로 맞대면하는 즐거운 경연(?)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영조는 박문수에게 무조건 적인 사랑을 보낸 것일까?
경종 4년, 시강원 설서가 되어 왕세자 영조의 교육을 맡은 이후, 박문수는 영조를 지성으로 보좌했다. 숙종이 살아있던 시절 소론은 경종을 후계자로 밀었고 노론은 영조를 후계자로 밀었다. 이후 경종이 왕이 되었지만 급사하자 소론은 영조를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이때 소론의 일원이었던 박문수는 '삼종(三宗 : 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은 오로지 경종과 전하뿐이니 신민으로써 한마음으로 추대해야 한다'면서 조직의 뜻을 거스르면서도 영조의 편을 들었다. 영조 4년 영조의 출신을 문제 삼은 반란인 '이인좌의 난'에서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는 영조를 토벌군의 종사관이 되어 지키면서 수많은 공을 세워 2등 공신인 영성관에 봉해진다. 이렇게 그는 영조에게 한결같이 충성스러웠다.
박문수는 단순히 충성스럽기만 한 신하가 아니었다. 업무 능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다. 백성들을 철저히 괴롭히던 균역법을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반박하면서 균역법 개혁의 시동을 걸었고, 백성 구제업무에도 열성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해관계자나 타 부처와 충돌할 일이 많았는데 박문수는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서 꿋꿋이 밀어붙였다.
한 예로 경상 관찰사 시절, 바다로 떠밀려오는 가재도구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뜬금없이 황해도로 구호물자를 보낸 일이 있었다. 보통 구호를 할 때는 조정에서 허가를 얻고, 황해 관찰사에게도 양해를 구하는 여러 가지 과정이 있었는데 박문수는 '한시가 급하다'며 구호를 밀어붙였다고 한다.
관원들은 우리 나리가 머리가 이상한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명이 명인지라 물자를 싣고 갔는데 정말 수해로 난리가 나서 아연했다는 일이 있다. 박문수는 떠내려온 가재도구의 흐름을 보고 어디서 쓰는 물건인지, 어떻게 떠내려온 것인지를 알아맞혔다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국가에 대한 절차를 무시한 일이라 반대세력인 노론의 엄청난 공격을 받았지만 영조는 백성을 위한 일이었다며 적극적으로 감싸줬다.
그야말로 영조는 박문수에게 콩깍지가 씌었다. 영조 7년 7월 8일, 영조는 박문수에게
깊이 생각하고 널리 염려하여 일을 맡으면 반드시 효과를 거두니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가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경이다
라면서 신뢰를 보냈다.
하지만 박문수가 아무리 충성스럽고 능력이 뛰어나도 상사가 그를 인정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만약 그의 왕이 광해군이었으면 옥사를 일으켜서 죽였을 것이고, 선조였음 대간들의 탄핵에서 막아주지 않아서 정계 은퇴하게 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영조는 아버지로서, 인간적으로써는 결격사유가 많았지만 군왕으로써는 훌륭했다. 민생에 항상 관심을 기울였고,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는데 노력했다. 그런 왕에게 당파를 떠나서 자신을 지지하고, 백성들을 위해 힘쓰는 박문수는 보기 드문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영조는 박문수를 한사코 보호해줬다.
박문수도 이를 알았던 모양이다. 영조 9년 박문수는
본디 어리석고 광포해서 툭하면 제 멋대로 행동했는데 전하께서 포용해주신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이에 마음에 품은 것은 반드시 말함으로써 보답하겠다고 한다.
이라고 한다. 그래서일지 나중에는 영조의 욱하는 성격, 고집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는데 영조는 웃으면서 그대의 말을 잘 알아듣겠다고 답한다.
조직의 사장쯤 되면 돈을 잘 벌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지만 실은 외로운 존재다. 굽실대는 사람만 있고 격의 없이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조직에 없다. 그래서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능력은 그들이 집에서 안식을 취하게 만들지 않는다. 가족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가정에서도 '가끔 오는 아저씨 신세'가 된다.
영조는 강력한 왕이었지만 이는 노력과 실력으로 오랫동안 장수하면서 쌓은 결과지 처음에는 굉장히 약한 왕이었다. 어머니는 무수리에 노론은 형인 경종이 정통성이 있다면서 공격했고, 소론은 자신을 보호했지만 이것은 영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한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박문수는 주욱 일관되게 행동했다. 왕이라고 주눅 들지 않고 할 말은 다 했고 일체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 솔직하기만 한 게 아니라 업무 능력도 뛰어났다. 그리고 충성심이 있었다. 본인은 인조 보고 고집 좀 버려라, 성질 좀 죽여라 항상 쓴소리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왕의 정통성이니 어쩌니 물고 늘어지면 끝까지 왕의 편에 서서 버텼다.
역량 있는 상사 입장에서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부하인가? 영조 32년, 박문수가 죽자 영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안타까워했다.
영성(박문수)이 세자궁에 있을 때부터 나를 섬겼으니 33년이 흘렀다. 자고로 군신 간에 뜻이 맞는 경우가 많다지만 나와 영성과 같은 관계가 있었을까? 내 마음을 잘 하는 사람은 영성이며 영성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그가 언제나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깊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정승이 되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애통해하면서 영의정으로 추승한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난 것 자체가 복이었을 것이다.
역사 리더십 경영 매거진의 테마를 바탕으로 새로 엮어낸 <조선 리더십 경영> 이 와이즈베리/미래엔에서 2018년 11월 하순 출간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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