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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참 이기적이다.

그래도 운행은 혼자가 편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by 히맨
'정말 맛있다! 혼자 먹어도!!'

일찍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뭔가에 씌인듯 부랴부랴 밥을 한다.

텐트 안에서 방금 지은 밥을 전날 어르신께서 주신 볶음 고추장과 김자반과 함께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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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T 내내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아.'


적응력이 대단한 그는 또 생각한다.

'그런데 좋아하는 여자와 함께라면 더 대박이겠다.'

문득 그는 커플로 백패킹을 다니는 모습을 자주 공유하던 한 친구가 부러워진다.

'에이~ 짐이나 챙기자~'

5일 동안 걸은 양말은 구멍이 났다. 여유 있게 챙겨 왔으나, 앞으로 과연 몇 켤레를 신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 정도면 앞으로 수시로 갈아 신어야 할 듯하다.


아침부터 바람과 운해로 가득한 길 속을 걸어나간다. 바로 앞의 길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서늘한 날씨에 몸이 떨려오는지 처음부터 걷는 속도가 많이 빠르다. 얼마쯤 걸었을까, 이내 운해가 걷히고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길을 걷다 만난 한 하이커가 멀리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멋진 풍경이네요" 하며 아침인사를 건넨다.


8시 19분.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생각에 잠긴다.


'나는 아직도 산을 운동기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그 생각을 언제쯤 떨쳐버리고,
산과 경쟁하는 것이 아닌,
산과 혹은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군대에 있을 적부터 산을 타기 시작한 그가 지금껏 산을 대하는 태도는 아주 이성적이다. 원래 무감각한 사람인지 일부러 감성을 억누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기계적으로 기록을 하고 영상으로 보고를 빼놓지 않는 모습을 보면 그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것 같다.

"현재 문제는 먹을 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데요. 400ml 정도의 물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트레일 엔젤이 가져다 놓은 듯한 물통 두 개를 만난다. 정수가 되지 않은 물이니 꼭 정수를 하라는 메시지가 통에 쓰여있었다. 옆으로는 또 다른 길이 있었는데, 그 길로 가면 물이 있는 듯 다른 하이커가 물을 받아온다. 물이 부족한 느낌에 서둘러 온 급수 포인트인데, 그렇다고 물을 받으러 옆길로 새기도 싫은 눈치다. '아직은 운행하며 마실 물은 있으니까' 하며 약간 쳐진 형을 위해 메시지를 남긴다.

'필터가 필요한 물이네요. 물이 많이 부족한 거 아니면 바로 다음 포인트로 오세요'

메시지를 남기고 바로 출발하려는 순간 형이 금방 나타났다.


물에 대한 압박감을 안고 운행을 이어가던 그가 스마트폰으로 PCT 애플리케이션을 확인하더니, 고프로의 셔터를 누른다.


"100km 지점입니다.
앞으로 4200km만 더 가면 PCT완주입니다."


멕시코 국경 0km 지점에서 출발해서 6번째 운행만에 100km 지점을 지난다. 그는 항상 산행을 할 때면 러닝에서의 계산법으로 긍정적인 멘탈을 유지한다. 예를 들면 목표지점까지 400m가 남았을 때, "이제 트랙 한 바퀴만 돌면 되네? 별 거 없구만~" 이렇게 받아들이는 식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지금까지 걸은 거리를 42번 반복해야 끝나는 PCT완주는 그에게 분명 까마득한 미래일 것이다.

약 20km를 걷고 나서야 겨우 급수시설을 만날 수 있었다. 수도로 되어 있는 잘 갖추어진 포인트에는 다른 하이커들로 북적였다. 배낭을 내리고 바로 수낭을 꺼내 들었다. 남은 물이 250ml. 20km를 걸으면서 150ml밖에 마시지 않은 셈이다. 그는 수낭에 한가득 물을 받은 후 앉아서 쉬면서 형을 기다린다. 쉬는 시간을 길게 가졌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잘 따라오더니 오늘따라 그가 빠른 건지 형이 지친 건지. 결국 약 2.5L의 물을 채우고 일어나 자기 페이스대로 운행을 이어나간다.


원래의 최종 목적지인 캠프 사이트에 도착했다. 길 옆에 위치한 작은 평평한 지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바람은 매섭게 불어 댔고, 그 바람을 막아줄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 열악하다.

'여기에서 잘 수는 없겠다.'

휴식을 취하며 형을 기다리기로 한 듯 매트리스를 펼치고 앉는다. 더 나은 다른 곳을 찾아 운행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출발 전 형과 약속한 장소가 여기니, 그냥 갈 수 없었을 거다.

'아~ 배고파.'

매서운 바람 속에서 바람을 막아가며 스토브에 불을 붙이고 밥을 해 먹는다. 이런 모습을 남기고 싶었는지 고프로를 꺼낸다. 바람을 등지고 쭈그려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이 참 불쌍해 보인다. 그런데 얼굴은 왠지 즐거워 보인다. 마치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

커피까지 타 먹는 여유를 부리며 한 시간째 거센 바람을 맞으며 앉아있다. 건너편에서 쉬고 있던 다른 하이커들도 전부 떠나고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물은 분명 받았을 테고, 크게 걱정은 안 되는데......' 그럼에도 계속 형이 나타나지 않는 이 상황은, 무슨 일이라도 난 건지 많은 상상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헤어지는 건가?'
'정말 사고 난 거 아냐?'

'그럼 난 다시 찾으러 뒤돌아 가야 하나?
그러긴 정말 싫은데…'

'그냥 무시하고 진행해서 완주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난 참 이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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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을 더 기다린 그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떠나기로 결정한다. 해가 지기 전에 떠나야겠다는 생각이다. 떠나더라도 어떻게든 연락을 시도해보자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떠올린다. 골똘히 생각하더니 네임펜을 꺼내 들고 제로그램 로고 현수막의 귀퉁이에 메시지를 적기 시작한다.

'WRCS077(Scissors Crossing)로 오세요!!'
time 15:35

그리고 손톱깎이에 달린 작은 가위로 잘라내기 시작한다. 표식에 메시지를 남겨 다음 포인트에서 만나기를 바라며.



출발 준비를 마친 그가 메시지를 손에 들고 길 옆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려 일어선다.

그 순간.

길 위에 형이 보인다.

"형~ 왜 이리 늦었어요~"
"난 무슨 일 난 줄 알았네~"

"하도 안 와서 이렇게 메시지까지 썼는데!"


이제 막 도착한 형과 다시 휴식시간을 갖는다. 형 또한 그가 물이 없어 큰일 난 줄 알고 걱정했단다. 그가 무슨 걱정을 하며 형을 기다렸는지 형은 알지 못하는 듯. 그러면서 물을 일부러 아껴 마셨단다. 아마도 도착해서 먹으려고 아껴두었을 콜라 한 캔을 꺼내 나눠 마신다.


'휴~ 다시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다시 만났으니 되었다.'


다시 운행을 재개하며 지금까지의 상황을 다시 되돌아본다.


"앞으로 어떻게 운행을 할지 가서 조금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네요"


바람은 계속해서 불어오고 길은 큰 변화 없는 황량한 모래벌판이다.

'아~ 지루해~ 음악 듣고 싶다.'

이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싶더니 역시나 고프로를 집어 든다.

"지겨움이나 힘든 것을 잊기 위한 무언가 장치를 하고 싶은데 그래도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앞으로도 운행 중에는 외부 요인이 작용하지 않도록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처음으로 거의 모든 운행을 각자 진행한 6일 차.

불안함과 걱정은 있지만, 그래도 운행은 혼자가 편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20150420#6_CS0056(CS in boulder field)-WRCS077(Scissors Crossing)

by 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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