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두고 돌아다니면 안 되겠다.'
Please keep our packs just for an hour.
(우리 배낭을 한 시간만 봐주세요.)
Thank you!!
첫 재보급을 받는 날. 배낭을 캠핑장 오피스 앞 나무 밑에 기대 놓고 배낭을 부탁하는 메시지를 남긴다. 그리고 라구나 우체국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얼마나 되었을까, 뒤에서 차가 다가온다. 형이 히치하이킹을 해서 따라왔다. 그렇게 둘은 차를 타고 라구나 우체국으로 이동했다. 그에게는 첫 히치하이킹이다. 낯선 외국인의 차를 얻어 탄 것이 신기한 듯하면서도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능숙하지 않은 영어 때문이지 싶다. 그는 뭐라도 한 마디 해야겠다 생각했나 보다. 차 안에 고프로 박스가 보인다.
"Here's gopro box."
(고프로 박스가 있네요.)
"You are a gopro user, right?"
(고프로 유저인가요?)
우체국 영업시간을 몰랐던 둘은, 우체국이 문을 열기까지 3시간을 대기해야 했다. 조금 난처해하더니 이내 자연스럽게 바로 옆 가게로 향한다. 이미 많은 하이커들이 와 있다. 먹을 것들이 가득한 진열대와 각종 기념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에서 보았던, 스내플 레모네이드도 냉장고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게 셰릴이 그렇게 간절히 마시고 싶어 했던 스내플 레모네이드 구나' 맛이 궁금했던 그가 한 병 집어 든다.
이번에는 엽서를 구경한다. PCT에서 편지를 써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그였다. 생각보다 맘에 드는 것이 없는 듯하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나무로 만들어진 엽서를 발견한다. 여러 장 사고 싶지만 가격이 마음에 걸리는 듯하다. '첫 재보급지인데, 앞으로 다른 종류의 엽서들을 많이 볼 수 있겠지' 다람쥐가 그려진 나무 엽서를 하나 집어 든다.
계산대에는 둘과 마찬가지로 우체국 오픈을 기다리는 다른 하이커들이 간식거리를 들고 줄 서 있었다. 그 줄의 뒤에 선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다.
"한국분이세요?"
한국말이다! 이곳에서 한국인을 만나다니! 맥주를 계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어르신은 우리를 보더니 도움을 요청한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 총 세 명뿐인 줄 알았는데, 또 다른 한국인 PCT하이커가 있었다.
어르신의 첫인상은 매우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무더위에 제대로 급수도 하지 못 해 많이 지친 듯 보였다. 어르신은 둘의 출발 하루 뒤인 4월 17일에 출발하여 이곳까지 힘겹게 도착했다고 했다.
"맥주 한 잔 해요~"
어르신이 그에게 맥주를 건넨다.
그는 어르신이 궁금했다. 이름은 윤은중. 어떤 산악회 소속도 아니고 준비도 혼자서, 정보도 없이 그냥 왔다고 했다. 엄청난 짐을 보니 그간의 고된 운행이 느껴지는 듯하다. 지금까지 함께한 다른 외국인 하이커들의 보살핌이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전혀 영어를 못 하시는 듯하다. 거기에 2009년에 이미 아팔란치아 트레일(Appalachian Trail, AT)을 완주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에 한번 더 놀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영문 숫자 셈을 적어 드려야 할 정도로 외국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이 길고 긴 길에 섰다는 것이 참 대단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어르신의 소식을 딸이 PCT하이커 페이스북 그룹을 통해 전하면서, 이미 큰 배낭을 짊어진 아시안 하이커로 유명해진 듯했다. 한 하이커가 딸의 페이스북 게시물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떠나보낸 아버지를 걱정하는 딸의 글을 보며, 어르신은 뒤돌아 눈물을 훔쳤다. 충분히 이해 간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두고 온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이제 겨우 4일 차인데… '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면서, 동시에 앞으로 있을 수많은 외로움을 자처하며 이 길에 서게 된 사연이 궁금해진다. 하지만 어르신은 말씀을 아꼈다.
'무언가 쉽게 말하지 못하는 그만의 PCT의 목적은 무엇일까?'
한 하이커가 우쿨렐레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하와이에서 왔다는, 가게 앞에서 둘에게 행운의 부적이라며 5엔을 선물해준 친구였다. 경쾌한 연주 속 맥주와 간식을 즐기는 하이커들과 어우러진 풍경이, 마치 영화 속 여유로운 여행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형은 어깨를 들썩이며 연주에 답한다. 그는 놓치고 싶지 않은 듯 고프로를 꺼내 들었다. 그야말로 평화롭다.
그가 우체국에서 어르신의 재보급 발송을 돕는다. 어르신은 다음 재보급지로 보낸다고 하며 내게 주소를 적은 메모를 보여준다. 테하차피(Tehachapi), 무려 800km나 뒤에 있는 곳이었다.
'한 달은 걸릴 텐데... 그동안 먹을 걸 전부 지고 가신다는 건가?'
우체국 직원은 매우 친절했다. 미국에서의 첫 우체국의 이미지가 상당히 좋게 다가온다. 그 또한 PCT에서의 첫 재보급 박스를 받고 기념촬영을 한다. 그가 가장 크게 불안해했던 것이 재보급이었다. 이렇게 트레일 중간에 스스로 만든 식량 박스를 진짜로 받게 되어 신기한 모양이다.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각자의 길로 떠났다. 재보급 박스를 들고 캠핑장으로 되돌아 가며 생각했다. 눈물을 훔치던 어르신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아직 그런 서글프고 그리운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다지 소중하게 여기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원래 나는 무감각해서인가??’
참, 외국인 하이커는 어르신을 온도계라는 뜻의 '써모미터(Thermometer)'라고 불렀다. 아마도 트레일 네임인 듯한데, 그렇게 불리게 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국에서 온도계를 선물로 줄라고 몇십 개 샀어요."
한국에서 떠나기 전 온도계를 몇십 개 구매하셨다 했다. 길에서 만난 다른 하이커들의 선물로. 그동안 정확히 알지 못 했던, 어르신의 트레일 네임이 Thermometer로 지어진 이유였다. 또한 위스키와 커피믹스를 항상 챙겨 다녔고, 아낌없이 그리고 바라는 것 없이 나눠 주었다고 한다.
그도 트레일 네임에 대해 고민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전까지는 그냥 '본명'으로 걷기로 한다.
둘의 배낭을 놓아두었던 캠핑장 오피스 나무에 돌아왔다. 메시지를 누가 읽고서 다시 꽂아 놓은 듯 처음과 다르게 보였으나 그 외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문제를 발견한다. 그의 배낭 옆 주머니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행동식 포장도 같이 뚫린 채. 아마도 다람쥐가 그 범인이지 않을까 추측하며 PCT를 위해 새로 산 배낭이 5일 만에 뻥 뚫린 것에 속상해한다. 어쩌겠는가 어차피 앞으로 자연스레 헤질 배낭이니 너무 마음 쓰지 않기로 한다. 쿨한 척 한 마디 한다.
"다람쥐 엽서 샀다고 다람쥐가 화났나 봐요"
그리고 생각한다.
'어디 두고 돌아다니면 안 되겠다.'
다시 운행을 이어갔다. 어제부터 긴 휴식을 가진 탓인지 몸은 가뿐하다. Pioneer Mail Picnic Area에서 급수를 한번 하고 계속해서 운행을 이어갔다. 평탄한 비포장 길 옆으로 고인을 애도하는 많은 메모리얼들이 눈에 띈다. 바위틈에 핀 꽃은 뭐랄까 먼저 간 이를 위로하는 듯하다. 잘 살펴보니 조화이긴 했지만.
'여기가 분명 캠프 사이트라고 되어 있는데...'
캠프 사이트라고 도착한 곳에는 커다란 바위들 말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위 중간중간 하이커들이 눈에 띈다. 캠프 사이트 맞기는 한가보다. 지금까지 너무 좋은 캠핑장에서 지낸 영향도 있는 것 같다. 바위 위로 올라서 보니 꽤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커다란 바위들이 거센 바람을 막아주는 적당한 장소에 사이트를 잡았다. 생각보다 멋진 사이트다. 둘은 신이 난 듯 바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그가 저녁을 먹고 노을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 평안해 보인다.
오늘도 어김없이 영상 다이어리를 쓴다. 바로 옆으로 붙어 있는 형에게 들리지 않게.
그는 이틀 전쯤 운행 중에 들은 형의 한 마디가 계속 신경 쓰이는 듯하다.
"너도 음악 들으면서 걸어봐. 좀 더 생각하는데 도움이 될 거야."
20150420#5_Mt. Laguna CG-CS0056(CS in boulder field)
by 히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