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맨 Feb 23. 2016

아직 버릴 것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

앞으로 어떤 것을 버리게 될까?

"항상 출발할 때는 길을 헤매는 것 같습니다."


고프로로 셀카를 찍으며 한 마디 한다. 평소에도 참 심각한 길치인 그는, 이곳에서도 여전하다. 이제 3일 차이기는 하지만 출발할 때마다 길을 헤매는 걸 보면, 앞으로가 참 걱정이다.


지그재그로 오르막이 이어진다. 그래도 아직은 여유가 있는지 셀카를 연신 찍어댄다.

"컨디션이 정말 좋은 거 같아요"

"마음 같아서는 라구나에 예정보다 하루 더 일찍 도착하고 싶네요"


그는 영상 콘셉트에 대해서 준비 단계에서부터 계속 고민 중이다. 운행 출발 및 종료 기록, 하루를 마무리하는 다이어리 영상 등 일단 생각나는 대로 영상을 최대한 남기고는 있지만, 그는 이 길을 짧고 강렬하게 표현하고 싶다. 이미 지루한 일상 속의 사람들은 지루한 걸 싫어하니까.

'과연 이 긴 길을 어떻게 압축하여 표현할 수 있을까?'

매일마다 발의 모습을 찍어서 타임랩스로 만들까, 하루하루 숫자를 만들어 이어 붙일까, 다른 PCT하이커에게 이 길에 선 이유에 대해 인터뷰를 해볼까... 무언가 딱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다. 계속해서 고민해봐야 할 듯하다.

앞에 누군가 다가온다. 보이스카웃으로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줄을 지어 지나간다. 길을 비켜 준 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그는 오르막보다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는 그늘이 없는 것이 더 힘겨운 듯하다. 국내에서 준비할 때는 이해하지 못 했던, 양산을 쓰고 걷는 하이커들의 모습이 이해가 되면서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다. 겨우 겨우 낮은 풀의 그늘에 숨어 휴식을 취한다.


"형은  어지러운 거 괜찮아요?"


"약간 어지러운 거 빼곤 괜찮아."


"오케이"


4번째 쉬는 시간. 다음번에 점심을 먹고 낮잠도 자자 했지만 그럴만한 공간은 나와 주지 않았다.


"형, 조금만 더 가서 넓은 데서 쉬어요."

형은 그 좁은 공간에서라도  밥 먹고 쉬길 원했지만, 그는 아직 힘이 남았는지 좀 더 넓은 곳에서 쉬고 싶은 눈치다.

"난 여기서 좀 쉬고 갈게, 난 괜찮으니 가고 싶으면 먼저 가"

형은 내가 원하면 먼저 따로 가도 좋다 했고, 그는 뭔가 아쉬운 듯 결국 따로 운행을 이어간다.

첫 헤어짐, 혼자였다.

힘이 빠진 상태여서 였는지, 날씨 때문인지, 혼자가 어색해진 건지 약간의 불안함이 느껴진다. 아마도 아무리 걷고 걸어도 나오지 않는 그늘 때문일까...


"오늘이 첫 번째 고비인 거 같아요"

"계속 같이 걷다가 혼자 걸으니까 약간의 두려운 감이 생기기는 합니다."

"그늘은 언제 나타나나요"

운행 초반 좋았던 컨디션은 중반 이후 급격히 떨어진다. 빨리 이 구간을 벗어나고픈 마음에 더욱 힘을 짜낸다. 그늘이 나올 때까지 약 80분 정도를 오버해서 걷는다. 그늘에서 쉬면서, 20분간 콜라도 마시고 하니 또 금방 추워진다. 이놈의 날씨는 참... 렌체리아 캠핑장(Burnt Rancheria CG)을 향해 다시 출발. 


그는 어깨가 조금씩 힘겨워진다. 그리고 속도는 많이 줄었다. 곧 뒤에서 형이 나타났다. 사실 내가 먼저 가서 쉬고 있는, 그리고 여유롭게 형을 기다리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나랑 엄청나게 차이가 날 줄 알았는데… 약 500m ~ 1km를 남기고 잘도 쫓아왔다. 의외로 쉬지 않고 걸어온 모양이었다. 웬일로 형은 힘이 펄펄 넘치는 듯 생각보다 잘 따라와 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형이 살이 빠지면서 점점 힘이 붙을 테고, 나를 앞질러 가지 않을까?’
뭐 어쨌든 오늘 고비를 잘 넘긴 듯하다.


"오늘도 고마워~"


렌체리아 캠핑장에 도착한 후 형이 말한다.

첫날 Hauser Creek 사이트 이후 이틀 연속으로 잘 갖추어진 캠핑장에 자리를 잡는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이곳에서 많은 PCT하이커들을 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텐트가 아닌 타프 아래 자리를 잡은 하이커를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완전 가볍겠다~ 하지만 안정적인 실내를 포기할 순 없어.'

늦은 밤 그의 텐트 안. 고프로가 빨간 불을 깜빡이고 있다.

"밤이 너무 추워서 밥을 해서 침낭 안에 넣을 계획입니다."

"요리를 해볼게요. 제로그램 알파미 첫 시도"

저녁을 먹고도 모자란지 급 야식이 당긴 그가 밥을 하기 시작한다. 침낭 안에 따뜻한 밥 주머니 넣는다는 핑계로 …  잠시 고민을 하더니 결국 먹는 건 포기하고 침낭에 넣기로 결정한다. 밥이 끓기를 기다리며 다이어리를 쓰고, 공용비 사용내역을 정리한다.

"침낭 안에 넣습니다. 터지진 않겠죠?"


"모노드라마 찍냐?"

 바로 옆 텐트의 형이 한 마디 한다.


"나중에 다 만들 거예요~"

스스로도 웃기는지 피식하며 한 마디 한다.


쌀쌀함에 바라클라바를 꺼내 쓴 그가 영상 다이어리를 남긴다. 바라클라바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눈이 커 보인다. 작은 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 속삭인다. 아마도 바로 옆에 있는 형을 의식한 듯하다.

"운행이 끝난 후 어지럼증이 조금 있네요"

"에너지를 잘 보충해야 될 것 같습니다."

뜨거운 태양이 아직은 버거운가 보다.


4일 차 아침. 모든 준비를 마치고 출발 전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야생 동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아주 단단한 철제로 된 쓰레기통.

'어떻게 여는 거지?'

그가 갸우뚱하며 쓰레기통 이곳저곳을 살핀다. 이내 잠금 장치를 풀고 열어젖힌 쓰레기통 안에는 다른 하이커들이 버린 멀쩡한 식량들이 들어 있었다. '아~ 정말 아깝다.'라는 생각과 함께 잠시 챙겨갈까 고민을 한다. 하지만 아직 그 정도로 배가 고프진 않은 듯하다. 다시 출발.

다음 목적지였던 라구나 캠핑장(Laguna CG)은 그리 멀지 않았고 오후가 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제 보다 훨씬 크고 좋은 캠핑장이다. 텐트를 치고 짐을 푼 후, 형은 그곳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와 가게로 향했다. 그동안 그는 짐을 지키며 고프로와 함께 캠핑장을 둘러봤다. 평화로운 캠핑장 주변을 쭉 훑어보며 천천히 걷는다가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본다. 새카맣게 타버린 다리. 그런데 그는 항상 긴 바지를 입고 있었다. PCT가 아닌 LA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까맣게 타버린 다리였다.


점심을 먹고 오랜만의 '뒹굴 뒹굴'을 감행했다. 이게 얼마만의 여유인지... 텐트 안은 언제나 아늑하다. 누워서 고프로를 가지고 논다. 높은 나무들이 텐트 입구 밖으로 보인다.

그가 바느질을 한다. 샌디에이고에서 머물 때 선물로 받은 벨크로 부착형 태극기를 배낭에 어떻게 부착할까 고민을 하더니 벨크로 부분을 떼어낸다. 실과 바늘을 꺼내어 박음질을 시작했다. 부착 위치는 한국에서 출발 전 미리 박음질로 단단히 박아 놓은 빨간 명찰 위다. 그 빨간 명찰은 20대 초반을 그와 함께 했고, 티벳의 6206m 봉우리를 함께 오르기도 했다. 그에게 명찰을 다는 이 행동은 무언가 결의를 다지는 의식과 같다. 이름을 한 땀 한 땀 단단히 박으며 자신의 이름 석자가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다짐한다. 그 위의 태극기는 그 무게를 한 층 더했다. 그렇다고 이 시간이 부담스럽다거나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따스한 햇살 아래 배경음악을 깔아놓고, 형이 가게에서 사 온 블루문 맥주와 감자칩을 먹으며... 허리는 좀 뻐근한 듯 자세를 종종 고쳐 앉기는 하지만 오랜만의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다. 

그는 지금껏 기록한 수첩을 꺼냈다. 출발 전에 구매한 가이드북과 재보급지를 정리한 인쇄물, 그리고 아이패드도 꺼냈다. 시간 여유가 생긴 김에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해 치울 생각이다. 어떤 형태로 운행을 기록할지 고민한다. PCT준비 과정에서 행정과 재보급 문제에만 온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길에 대한 정보와 기록 계획에 대한 생각은 하지 못 했던 그다. 지난 3일, 이전에 경험했던 기록 방식대로 수첩에 펜으로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기록했다. 기상시간과 더불어 영상과 마찬가지로 출발 및 종료 시간, 운행거리, 쉬는 시간 등의 기본적인 운행기록에서부터 삼시 세끼 무얼 먹는지, 운행 중 물은 얼마나 마셨는지, 심지어 대소변 횟수까지... 그는 이러한 기록들을 일일이 수첩에 적은 후에 생길 후폭풍이 두려웠다. 어떻게 효율적으로 기록을 관리할지 고민하 던 중 구글 드라이브를 활용하기로 했다. '운행기록'스프레드시트를 생성하여 수첩에 적은 기록들을 하나씩 옮겨 입력한다. 이제 조금 무언가 틀이 잡힌 느낌이다. 여기저기 정신없이 흩어져 있는 물건들을 보며 생각한다. 

PCT DAY#4 20150419
어쩌면 버릴 것이 많은 사람에게 유리한 PCT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직 버릴 것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


앞으로 어떤 것을 버리게 될까?


20150418#3~#4_Boulders Oak CG-Burnt Rancheria CG-Mt. Laguna CG

by 히맨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