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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맨 Feb 01. 2016

내가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가 바보같이 실실 웃고 있다.

아주 푹 잘 잤다. 일어난 그는 텐트 문을 열어젖혔다. 형은 물건들을 한 데 모으고 있었다. 그렇게 극찬을 마다하지 않던 Keen 샌들을 버리겠단다. 술 병도, 삼각대도... 읽겠다고 구입한 책도 태워버리려 일부분 찢었다. 아주 큰 결심을 한 듯했다.

그는 생각한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슬슬 신선이 되어가는 과정인 것인가?'


"형 그럼 이건 제가 가져 갈게요"

그는 영문판 PCT소설 '와일드'를 집어 들며 말한다. 한국에서 이미 한글판을 읽었지만, REI에서 발견하고 내심 살까 말까 고민하던 책이었다.


그는 딱히 아직 뭔가 버릴 만한 물건은 없는 듯하다.  그는 고프로에 정말 감사하고 있다. DSLR류의 카메라를 가져왔다면 분명 얼마 버티지 못 했을 거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아침으로 PCT에서의 첫 밥을 한다. 물론 물만 부으면 되는 동결건조식이긴 하지만. 먹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그런데 먹는 게 조금은 시원찮다. 절반 정도 먹으니 배가 부른 지 남은 절반을 챙겨 넣는다. 아직은 힘들지 않은가 보다. 일부러 앞으로 있을지 모를 식량부족에 대비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첫 재보급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이러다가 식량이 짐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다.

밥을 먹고 슬슬 운행 채비를 할까 하는데 뒤편에 있던 다른 하이커가 말을 걸어온다. 물 좀 얻을 수 있냐고 묻는다. 그는 출발 전 최대한 물을 가득 채워서 길을 나섰다. 수낭 3리터 그리고 날진 수통 1리터까지 무려 4리터. 거기에 뜨거운 환경과 앞으로의 급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아껴 마셨다. 겨우 800ml 밖에 마시지 않았다. 저녁에 파워에이드 원액을 짜 넣어 쉬면서 마시고, 밥을 하는데도 썼는데도 넉넉했다. 그렇다고 불안함이 없진 않았지만, 물이 간절해 보이는 그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파워에이드가 섞인 물을 조금 나누어 주었다. 아침부터 누군가를 도와주어 뿌듯해하는 듯하다.

우왕좌왕 널브러진 장비들을 챙기고, 텐트를 걷고 출발 준비를 하는데만 거의 두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이튿날 운행이 시작되었다. 뜨거운 날씨에 형은 더워하며 힘들어했고, 콜라를 마시고 싶다며 노래를 부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Lake Morena Country Park가 나왔다. 처음 보는 큰 규모의 캠핑장의 모습에 기분이 들뜬다. 많은 사람들이 캠핑을 하고 있다. 캠핑카를 위한 사이트들에는 수도와 전기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화장실에는 샤워시설이 있었다. 형이 먼저 샤워를 한 후 그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시원했다. 간단히 빨래도 하고 옷을 입고 나오는데, 형이 샤워실 앞 벤치에서 한국에서 챙겨 온 깃발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


'WATER WELCOME'
'COKE & BEER PERFECT'


"달고 가려고요?"

그가 묻는다.

형은 메시지 작성에 몰입하며 대답한다.

"응"

"사람들을 많이 만나잖아. 메시지가 필요할 거 같았어."

그 기발하면서도 엉뚱한, 재미있는 발상에 그는 카메라를 들이댄다.


형은 계속 콜라가 마시고 싶단다. 둘은 일단 근처에 가게가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 레인저 스테이션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첫 번째 PCT 방명록을 발견한다. 단순하게 A4에 출력한 서명 명단과 같은 모습. 무언가 대단한 것일 줄 기대했던 그는 약간 실망한 것 같기도 하다.


Setbacks just make you stronger,
if your thoughts are in the right place
(생각만 올바르면 좌절은 너를 더욱 강하게 들어줄 것이다.)

레인저는 캠핑장 반대편 길 건너에 가게가 있다고 말한다. 그곳을 나와 가게로 가려고 문을 열려는 순간, 그의 눈에 문 옆에 위치하고 있던 하이커 박스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는 거짓말같이 콜라가! 새빨간 자태를 뽐내며 누워 있는 잘록한 그 몸매에 절로 손이 간다. 트레일 매직이라고 하는 게 이런 걸까? 아무것도 모른 채 먼저 나간 형에게 그 매직을 전달하려는 듯, 그가 콜라를 등 뒤로 숨긴 채 다가간다.


"형 콜라 마시고 싶다고 했죠?"

"짠~!"

콜라를 나눠 마신 후, 형은 가게로 달려갔고 그는 화장실 앞에 앉아 짐을 지키며 기다린다. 잠시 아침에 있었던 일을 다시 돌아보며 다이어리를 끄적인다.

형은 생각보다 금방 돌아왔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두 병의 블루문 맥주, 그리고 배낭에 지고 다니겠다는 6캔의 콜라와 함께. 그 엄청난 콜라에 대한 집착에 헛웃음을 터트린다.


"이거 정말 지고 갈 거예요?"

"물 대신 지고 갈 거야 딱 여섯 캔"


그렇게 화장실 앞에서 아침에 남긴 밥을 맥주와 함께 먹는다. 그리고 형의 콜라 예찬과 함께 대화가 시작된다.

"형이 콜라를 사랑하는 게 어느 정돈지 넌 몰라~"
"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콜라라니까"
"칼로리도 높아, 맛도 있어~"
"하루에 한 모금씩 먹는 걸 되게 좋아해"
"집에서 스테인리스 컵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콜라 딱 반잔을 넣고 조금조금씩 먹는 거지"


"맥주 맛있지?"

형이 맥주를 들이키고 있는 그에게 묻는다.

"한국에도 있어요?"

그는 부드러운 느낌의 블루문 맥주가 마음에 드는 듯 물어본다. 앞으로 종종 찾게 될 것 같다.


둘의 대화가 조금씩 이어지기 시작한다. 마라톤, 군대 이야기부터 시작해 각자가 느끼는 PCT의 의미 등. 조금이나마 서로에 대해 알아 가는 듯하다. 첫날 운행 시작하자마자 잠깐 헤어진 일에 대해서도 각자 상황에 대해 알게 된다.


"어제 진짜 아 이렇게 헤어지나? 생각했어요."

"나 이제 자유인가? 아, 혼자 가야겠다. 이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아 좀 외로울 것 같다. 이런 생각도..."


"형은 웬만하면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버리면 네가 날 버렸겠지."


앞으로의 운행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며 어느 정도 규칙을 정하는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바닥에 널어놓은 빨래가 완전히 말랐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난 둘은 다시 레인저 스테이션으로 향한다. 그는 형의 샌들과 삼각대를 하이커 박스에 넣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한다. 무언가 기분이 좋은 듯하다. 맥주 때문인지,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인지 혹은 가벼워진 마음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다시 운행을 시작한 뒤, 형을 앞에 보내고 뒤에서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까먹지 않게 기록을 하고 싶었다. 그는 고프로를 켠 채 독백을 시작한다.


진짜 좋아요. 이런 트레일이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릴 수 있어 기쁜 것 같고요.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 같아요. 아직 이틀 째라 뭐라 말하는 게 섣부를 수 있는데,
그냥 길이에요 되게 잘 나 있어요.
사실 시작이 어렵지 해보면 별거 없거든요. 뭐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30년을 살면서, 여태까지 느낀 것은 항상 똑같았던 것 같아요.
해보면 별거 없어요 그냥 하면 돼요. 하세요.
그게 뭐 PCT가 될 수도 있고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생각나면, 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도 많은 사람이 왔으면  좋겠네요.
저는 오늘 정말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안녕~^^
20150417#2_16:58 


그가 바보같이 실실 웃고 있다. 행복감에 젖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피식’이었다.


"바보 같이 왜 그래~"


좀 뜬금없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그녀가 물었다.

손을 잡고 잠실대교를 건너던 그날 밤. 무언가 꿈속에 들어온 듯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말 행복해서"

- 2014년 어느 날 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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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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