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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롱데이(Long day)

지금이라도 어서 여기 도착하면 좋겠는데…

by 히맨
'오늘은 어디까지 가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운행 계획을 세운다. 적절한 거리의 사이트를 찾다가 빌리 고트 케이브(Billy Goat’s cave)라는 랜드마크로 되어 있는 사이트로 가기로 한 후 약간의 기대감과 함께 걷기 시작한다.


한참 걷던 중 마주친 한 커플. 좁은 길 위에 서서 지도를 보고 있다. 키가 큰 아주머니와 키가 작은 수염 난 아저씨. 부부는 트레일 네임으로 스스로를 소개했다.

'오크' 아저씨와 '사이프러스'아주머니.

"사이퍼스라고?? 아~ 사이프러스~! 나는 한국에서 왔어요"

영어가 서툰 그가 뒤늦게 알아들었다는 듯 말한다.


"혹시 뱀을 본 적 있니? 방울뱀이 구슬 소리를 내면서 슬금슬금 움직이는데 조심하지 않으면 콱~ 하고 물어버릴 거야! 위성을 이용하는 이 호출 장비가 없으면 죽을지도 몰라~"

유쾌한 오크 아저씨의 만화 캐릭터같이 과장된 제스처와 개구쟁이 같은 말투에 절로 웃음이 난다.


"여기 위치가 어디쯤인지 아니??"

부부가 그에게 지도를 내보이며 묻는다.

"음~ 잠깐만요"

역시 똑같이 여기가 어딘지 알지 못하는 그가 스마트폰을 꺼낸다. 어차피 길은 하나이고 그저 길이 나있는 대로 앞만 보고 가던 길이다. 길이 갈라져 헷갈릴 때만 애플리케이션으로 길을 확인하며 가고 있었다.

"여기는...... 대략 여기랑 여기 사이겠네요"


"그래 그런 것 같아"

이미 대략 위치는 짐작이 갔으나, 확신이 없었던 두 사람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다.


"어디서 오셨어요?"

그가 묻는다. 무언가 말을 걸고 싶은데, 딱히 생각나는 말이 없는 듯하다.

"우리는 여기 근처 오렌지 카운티에서 왔어. 그래 너는 한국에서 왔다고?"


"네"


"여기는 어떻게 왔니? 학교는 졸업했고?"


"네 학교는 졸업했고, 일하다가 그만두고 왔어요."

PCT를 위해서 그만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다.

"아~ 멋진걸! 무슨 일을 했어?"


"음...... 엔지니어요."


"어떤 엔지니어?"


"1년간 사우디의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기계 엔지니어로 일했어요"


"사우디에서 돈 벌어서 여기 온 거구나? 멋진 생각이야"

사이프러스 아주머니가 활짝 웃으며 이야기한다.

"우리는 두 아들이 있는데, 한 아이는 화학 엔지니어고, 한 아이는 전기 엔지니어야."

오크 아저씨가 엔지니어를 만나 반가운 듯 이야기한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 아니니?"

사이프러스 아주머니가 길 옆으로 보이는 풍경을 가리키며 묻는다.

"한국과 비교했을 때 정말 정말 거대한 것 같아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오크 아저씨가 한 마디하며 휘트니 산에 오를지 물어보더니 산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마치 그동안 말동무가 없어서 많이 심심했던 모양이다.

"꾸준히 잘 먹어야겠다~! 너무 말랐어~"

사이프러스는 마른 체형의 그가 걱정됐는지 한 마디 한다.

"그럼 어서 먼저 가~ 아니면 우리가 잡을 거야~"

장난스러운 그들의 인사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나는 듯 속도가 빨라진다. 정말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기 싫었거나 혹은 형이 따라붙기 전에 가고 싶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다. 모래, 돌, 작은 풀 정도만이 있을 뿐 황량함 그 자체. 그늘이 없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계속해서 반복되는 지그재그의 스위치백(Switchback) 길에 몸은 점점 지쳐만 간다. 겨우 찾은 그늘에서 행동식을 하나 꺼내 먹으며 잠시 쉰다. 다시 출발하려는데 장갑에 무언가 붙어있는 듯 다른 한 손으로 털어낸다. 동시에 무언가를 툭 쳤다.


"아!"


찔리고 나서야 뒤늦게 가시나무였다는 걸 알았다. 손바닥에 가시가 깊숙이 박혔지만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눈 앞에 보이는 뭐든 잡고 몸을 빠르게 끌어올리기에 바빴다. 적 헬기에 발각되어 죽지 않으려면 산 속 가파른 경사를 빠르게 기어 올라 몸을 숨겨야 했고, 정신없이 네 팔다리로 기어올랐다. 하필이면 오늘은 통신병이라 통신기까지 지고 있어 상당히 힘에 겨웠다.

- 해병 김희남의 국지도발 훈련 중 中.


인상을 쓰며 가시를 뽑는다. 선인장을 내리치고 만 것이다. 가시가 쑥 들어갔다 나온 손가락 끝에 핏방울이 크게 맺힌다.

"아, 따가워라. 힝~"

'음, 이런 것도 기록으로 남겨야 해'

그는 어김없이 고프로를 꺼내 든다.


급수지로 표시된 지점에 도착한다. 하지만 빈 물통이 있을 뿐이다. 주변을 살펴봤으나 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바로 옆 그늘에 쉬고 있던, 자신을 FM이라 소개한 한 하이커가 그에게 묻는다.

"물이 필요하니?"


"아니 괜찮아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그는 괜찮다며 거절한다. 남의 물을 얻어 마시기 미안한 것 같기도 하다.

'그리 많이 부족한 상황은 아니니 아껴 마시면 될 거야.'

그러면서 무언가 30km를 걸어 원래의 목적지인 빌리 고트 케이브에 도착.

"헐...... 이런!"


'이런데서 자라고??!'

애플리케이션에 적혀있던, 그러나 신경 쓰지 않았던 아주 작은 굴(very small cave)이라는 추가 설명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설마 하며 200m쯤 더 걸어가 보지만, 그 작은 굴이 오늘의 목적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되돌아 간다.

'이걸 어쩌지?'

작아도 너무 작다. 멋진 동굴을 생각했던 그는 매우 당황스러운 표정이다.


물이 넉넉했다면 여유롭게 근처 사이트를 찾아 되돌아 갔을 테지만 물이 필요했다. 내일 운행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애플리케이션에서 적당한 다음 사이트를 찾아보니, 무려 8km 떨어져 있다. 물과 사이트가 함께 있는 곳이다. 일단 여기서 잘 수는 없다고 판단한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가긴 가는데 지금 형을 기다릴지, 아니면 해가 지기 전에 어서 사이트로 달려갈지.

'형을 기다리면 늦어질 것은 뻔하고, 어쩌면 그 이전의 사이트에서 잘 수도 있다. 그럼 나는 이도 저도 안 되는 상황에 물까지 부족한 상황을 맞게 될 거야.'

이미 30km를 걸어 지친 상태에서 또다시 8km나 더 걸어야 한다는 상황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표정이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결국 또다시 메시지를 쓰기 시작한다.

WRCS101까지 가보려 해요.
불가능한 일정이라면 근처 사이트에서 주무시고 내일 Warner Springs에서 봐요!!
16:35

그는 메시지를 굴 옆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8km를 전력을 다해 급수지까지 뛰기 시작한다. 그의 표정에서 긴박함이 느껴진다.


"2km 정도만 더 가면 물이 있는 포인트가 있어요.

거기에 물이 없으면...... 망하는 거죠"


"서바이벌 게임하는 것 같네요"

"비가 오면은...... "

잠깐 생각을 하더니 머리 속에 무언가 떠오른 듯 말한다.

"오히려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빗물을 받아서 정수를 해서 먹을까 하는 생각이 방금 떠올랐어요."

"근데, 형이 좀 걱정이네요."


정신없이 거의 뛰다시피 하여 한 시간 반 만에 드디어 급수지에 도착했다.


"오늘 운행 어땠어?"

바로 옆 사이트에 텐트를 치고 있던 FM이 그에게 인사를 하며 묻는다.

"나 오늘 38km나 걸었어! 마일로 치면 음...... 24마일 정도?"

그는 스스로가 대견한 듯 대답한다.

"응 오늘은 롱데이야."

FM을 통해 오늘이 롱데이였음을 알게 된다. 급수가 가능한, 그리고 텐트를 칠만한 마땅한 사이트 간의 간격이 길어 대부분 하이커들이 장거리의 운행을 해야 했다. 그의 PCT 첫 롱데이였다.


정신없이 텐트를 치고 밥을 먹고 나니 그제야 다시 생각나며 걱정이 되는 듯하다.

'형이 지금이라도 어서 여기 도착하면 좋겠는데......'


"내일은 꼭 만날 수 있겠죠?"

"만나면 미안하다고 하고 잘 다독여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 나는 이기적이야" 라며 영상 다이어리를 남기는 그는, 의외로 혼자되니 많이 어색해하는 것 같다.

다음날 워너스프링스(Warner Springs)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안전한 곳에 사이트 잘 잡고 무사히 재회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날이 밝았다. 일어나서도 그는 출발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망설인다. 물론 밥을 먹을지 말지는 망설이지 않는다. 잘만 먹는다. 텐트 밖에서는 다른 외국인 PCT하이커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낯설어서였을까 텐트 문을 열고 나서기가 겁이 나는 모양이다. 길을 다시 나서기 전까지의 시끌벅적한 목소리들이 점차 잦아들더니 이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제야 텐트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나온다.


출발.


어제 사이트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실컷 물을 마신 후 다시 출발 직전.

뒤늦게 발견한, 나무에 적힌 경고문.


'테스트되지 않은 물이니 끓여 마실 것.'



Scissors Crossing(WRCS077) to WRCS101

by 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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