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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맨 이즈 온 PCT

히맨 이즈 온 PCT

by 히맨
혼자 출발합니다.


"13km 떨어져 있는 두 번째 재보급지, 워너스프링스로 향합니다."


운행 중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 듯 고프로를 꺼내 든다.

"8시 몇 분쯤 됐겠죠......?"

촬영 중 시계를 들여다보기 귀찮은 듯 힘없이 이야기한다.

"혼자 가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요"

"여태까지 뒤에서 누군가를 받쳐주면서 서포트해주는 역할을 줄곧 해왔었는데, 앞에서 가는 건 처음인 것 같네요. 어떤 일이든 그리 쉽지는 않네요. 지금은 좀 어색하긴 한데, 앞으로 적응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황금색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 그 길 위를 나 홀로 걷고 있다.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 구름이 끼지 않은 맑은 하늘이었으면 한참을 멍하게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길 위에 저 혼자 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이동 중입니다."


"나 혼자다!"

큰 목소리로 혼자라고 외쳐보기도 한다. 이번에는 고프로를 들고 한 바퀴 빙글 돈다. 조용히 혼자 걷다 보니 심심한 건지 외로운 건지 감성적이 된 건지. 그러더니 갑자기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당신이란 사람 정말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하네요
언제까지 내 안에서 그렇게
살아 숨 쉬고 있을 건가요
언제 죽어줄 생각인가요

시간이 흐르고
내 맘이 흘러서 그렇게
당신도 함께 흘러가야 되는데
정말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그리움에 울다 지쳐
잠이 드는 것도 이젠 지겹고

도대체 언제쯤에 난
당신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런 날이 오기는 올까요
(그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요)

시간이 흐르고
내 맘이 흘러서 그렇게
당신도 함께 흘러가야 되는데
정말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내 안에 살고 있는 너의 기억 때문에
내 맘 내 시간 다 멈춰 버려서
그 흔한 추억조차 만들지 못하고
난 아직도 이렇게 이별 중이죠

- Nell - 마음을 잃다 中.


당일 산행 온 하이커 그룹과 들판에서 뛰어노는 개와 아이들의 모습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굿 모닝~!"

마주치는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어른들과 인사하고, 뛰어노는 개들에게도 인사를 건넨다.

길 옆으로 멀리 산책(?) 중인 젖소 무리가 보인다. 근처에 목장이 있는 듯하다.

"젖소가 많이 보이네요. 아~우유 마시고 싶다"

그는 우유를 정말 사랑한다. 특히 빵에는 꼭 우유가 있어야 한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나타난, 파이프 게이트 옆으로 하이커를 환영하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곳을 통과할 형을 위해 게이트 옆 철조망에 표식을 남기기로 한다.

'뭘로 남기지?'

무언가 생각났는지 배낭에 달려있던 붉은 띠 고리를 떼어낸다. 샌디에이고에서 비행교육을 받는 중인 태진이 형이 선물해준 비행 전에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 같다.


'REMOVE BEFORE FLIGHT'

도로가 보인다. PCT는 저 앞으로 이어져 있는데, 재보급 장소인 우체국이 어디인지 몰라 헤맨다. 잠시 멈춰 고민하다 다른 외국인 하이커 한 명을 따라 걷는다.


'Welcom P.C.T. Hikers'.

12: 43 워너 커뮤니티 리소스 센터. 담장에 붙은 현수막이 신기한 듯 촬영한다. 센터 벽의 게시판에는 다양한 행사 및 안내문들이 붙어있다. 센터 앞 난간에 배낭을 내려 기대고선 문을 열고 들어간다.

'아~ 배고파'

많은 하이커들이 자리에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다. 왼쪽에는 작은 스토어, 안쪽에 위치한 주방에서는 햄버거 패티를 굽느라 분주한 모습니다. 겉모습은 마치 노숙자들의 쉼터 같은 느낌. 햄버거를 보자 어떻게 서든 그걸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

"햄버거는 어떻게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주방 앞 주문 리스트에 이름과 함께 점심메뉴 중 가장 비싼 더블 비프 치즈버거와 콜라 세트를 적는다.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어색하게 앉아있다.

'이 사람 잘 도착, 아니 잘 찾아 오려나?'

걱정은 되면서도 갓 구워 나온 푸짐한 햄버거를 그냥 쳐다만 볼 수 없었는지 이내 크게 한 입. 순식간에 절반이 사라졌다. 입을 오물거리며 창가 아래 테이블에 놓인 각종 식량과 장비들을 쳐다본다.

'조금 이따 챙겨야지.'

GOPR5982.JPG

한참 햄버거를 즐기고 있던 그때, 문이 열리고 익숙한 사람이 다가온다. 형이 나타났다!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역시 예상대로 목적지 이전의 사이트에서 다른 외국인 하이커들과 함께 머물렀다고 한다. 전날 만났던 오크&사이프러스 부부와 함께 있었던 것 같다. 배가 고프다는 형도 같은 메뉴를 주문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이어트 콜라와 함께 햄버거가 나왔다.

"콜라 노말(normal)로 주세요"

형이 주방에 요청한다.

"아, 레귤러(regular) 콜라 말하는 거지? 알았어."

역시 콜라 마니아 답다. 그도 아마 다이어트 콜라가 나왔다면 똑같이 바꿨을 거다.

그 모습을 보니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그리 쉽게 무너지는 약한 사람은 아니지. 이제 앞으로의 짐을 조금 덜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야.'

그는 형에게 게이트에 걸어놓은 표식을 보았는지 물어봤지만, 눈에 띄지 않았는지 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누군가에 의해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혹은 지금까지 길 위에 나 홀로 남겨져 있겠지.


"참, 어제 부부 하이커 만난 적 있어?"

"너보고 희남 아니고, 히맨이라던데? 강하고 빠르다며."


"아, 그래요?!"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그가 대답한다. 그는 <와일드>를 통해 처음 트레일 네임이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고, 걸으며 만나는 하이커들 마다 진짜 이름이 아닌 트레일 네임으로 소개하는 것을 들으며 스스로의 트레일 네임을 고민해왔다. 하지만 걸으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딱히 마음에 드는 트레일 네임이 생각나지 않았던 그다.

'이름하고 발음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내 이미지가 그렇게 다가갔다니. 맘에 드는데?'

그렇게 그의 트레일 네임은 '히맨'이 되었다.


트레일 네임은 트레일에서 쓰는 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PCT하이커들은 자신을 트레일 네임으로 소개한다. 스스로 자신의 트레일 네임을 짓기도 하고 다른 하이커들이 지어주기도 한다. PCT에서는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독특한 트레일 네임을 통해 서로 다른 하이커들과 소통한다.

- PCT 하이커 되기 - 0.1. PCT 용어 정리 中.


"이글락(Eagle Rock) 봤어? 완전 멋지던데!"

형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한다.

"앗, 그게 그거였구나! 이정표는 봤는데 그게 어플에서 봤던 그건 줄 몰랐어요. 아~ 아쉽네!"

이전에 신기하다며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이글락을 보지 못해 크게 아쉬워한다.

"뭐 어쩔 수 없죠. 일단 우체국 닫기 전에 바로 재보급 상자부터 찾으러 가죠"


우체국까지는 도로를 따라 2km쯤 걸어야 한다. 우체국 영업 종료시간인 오후 4시까지 얼마 남지 않아 서두른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여권을 챙기지 않은 걸 깨달은 그가 다시 되돌아 뛰어간다. 뛰는 모습을 보니 아직은 몸상태가 많이 좋은 것 같다. 다행히도 마감 시간에 정확히 도착해서 직원에게 부탁해 결국 두 번째 재보급 상자를 받았다. 묵직한 느낌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지고 갈지 고민도 되는 듯하다.


앞 뜰에 자리 잡은 텐트 안에서 재보급품 분류를 마치고 다시 커뮤니티 센터로 들어간다. 오랜 시간 한편에 마련된 컴퓨터에 붙어 앉아 있다. 현지에서 구매한 유심칩(USIM)을 이용해 개통을 위해서는 동기화가 필요했다. 아이폰 동기화부터 시도해보지만 새로운 프로그램은 깔리지 않도록 되어 있어 애를 먹고 있다. 결국은 포기하고 사진과 영상 백업에 열중하고 있다. GPS 기록도 자체적으로 업로드할 수 없어 파일만 마라톤 클럽의 윤구형에게 이메일로 발송해 업로드를 대신 부탁한다. 그런데 한글 자판이 깔리지 않아 작업이 정말 쉽지 않다.

'아~ 이 놈의 보안은 뭐 이리 철저한거야!'

아무리 방법을 찾아봐도 해결되지 않아 결국에는 영문 자판으로 한글을 치기 시작한다. 암호와 같은 이메일이 되었다. 그때 누군가 아는 척을 한다. 5일 차 첫 재보급지였던 라구나 우체국에서 뵀던 윤은중 어르신을 다시 보고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에 놀란 듯하다. 어르신이 그의 옆에서 무언가를 계속 물어보신다. 그런데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태도가 다르다. 무언가 작업이 풀리지 않는데 귀찮게 한다는 듯, 대충 대답하는 말투가 퉁명스럽기까지 하다. 시선과 온 정신은 이미 모니터에 팔려있는 듯하다. 그의 성의 없는 대답을 들은 어르신은 이내 그의 곁을 떠났다.


대충 정리가 끝난 그가 지쳤는지 테이블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제 커뮤니티 센터도 곧 문을 닫는다. 쉬고 있는 그에게 다시 어르신이 다가왔다.

"가스는 어디서 사요?"

뜨거운 국물이 없으면 안 된다는 어르신은 아마도 가스 소비가 많을 것이다.

"아, 가스요? 아마 저기 스토어에 가면 있을 거예요. 잠시만요."

함께 스토어로 이동해 가스를 찾아 준다. 가격에 대한 안내도 함께. 이후 어르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커뮤니티 센터는 문을 닫았고, 그 앞에 하이커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 그와 형도 텐트에만 있기는 아쉬운지 그들에게 다가간다. 이내 맥주를 잔뜩 싣고 온 차량이 우리 앞에 섰다. 맥주파티가 열렸다.


"앞으로 계속 오르락내리락할 거고, 걷다가 자고 또 걷다가 자고, 며칠 단위로 재보급도 받고......"

"원숭이들이 떼로 몰려오는 걸 보고 낙타를 타보기도 했어 그리고......"

수다스러운 오크 아저씨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느껴진다. 참 유쾌하고 재미있는 아저씨다. 오크 아저씨 외에도 미국에서는 잘 나가는 맥주가 뭐냐는 형의 물음에 "Free Beer~!(공짜 맥주!)"라고 대답하는 하이커 'FM' 등 참 개성 있고 유쾌한 하이커들이 많다. 여러 하이커들과 함께 둥글게 서서 스마트폰으로 재미있는 촬영을 하기도 한다. 모든 것들이 마냥 즐거운 밤이다. 아쉽지만 다음 날을 위해 잠자리에 든다. 오전의 고민과 걱정 그리고 즐거운 맥주 파티 등 하루 동안 많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조금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다시 길에 선다.


"너 이름이 뭐니?"

길에서 만난 한 하이커가 그에게 이름을 묻는다.


"음...... 내 리얼 네임(Real name)은 '희남'이고, 트레일 네임은......"


'히맨'이에요!


히맨은 PCT를 이어나간다.

히맨 이즈 온 PCT.

He-Man is on P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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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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