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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더니......

끝까지 오면 다시 길이 나타날 줄 알았는데......

by 히맨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서 텐트가 약간 오른쪽으로 옮겨갔어요."


12일 차 아침. 텐트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긴다.

고프로를 틀어놓고 간밤에 있었던 일들을 보고한다. 간밤에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다. 설마 날아갈까 하며 몸으로 버텼는데 웬걸, 급기야 새벽 4시쯤에는 히맨의 몸이 텐트와 함께 오른쪽으로 밀려나갔다. 언제부터인가 텐트 팩을 귀찮아서 박지 않고 있는데 이러다 언제 한번 제대로 날아갈 듯 싶다.

오늘은 처음으로 PCT를 벗어나 걷게 될 것이다. 그동안 PCT 브라운 스틱만 따라서 쉽게 길을 찾아갔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은 길이 될 것 같다. 길이 헷갈릴 때마다 애플리케이션에 나오는 대로 따라서 잘 걷기만 하면 됐는데, 대안길은 길이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 어제부터 걱정하던 히맨이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바람이 거세긴 하지만 풍경이 예뻐 지루한 줄 모르고 운행한다.


"09시 45분입니다.

엄청나게 바람이 붑니다!

근데 되게 기분이 좋네요!

마치 내가 살아있는 느낌,

모든 감각이 살아나는 느낌이네요!

기분이 좋아서 환호성을 질렀어요."


"와~좋다!"


즐거운 마음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시다 스프링스 갈림길, 산불로 폐쇄된 지점에 도착한다. 일단은 뒤따라 오는 형을 기다렸다가 함께 이동하기로 하고 배낭을 내린다.


'산불로 인해 이 안내판 뒤로부터 길을 폐쇄함'
NO
Water
4/22 thermometer

폐쇄 안내판 아래 이미 먼저 이곳을 지나간 것으로 보이는 윤은중 어르신의 쪽지가 재미있고 신기한 듯 쳐다본다. 영어도 전혀 못하셔서 원, 투, 쓰리, 포 숫자 세는 것도 히맨이 직접 적어드렸는데, Thermometer(써모미터)라고 자신의 트레일 네임을 또박또박 적은 걸 보니 어떻게 쓰셨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아, 어차피 여기로 갈 수밖에 없네요. 어플 상에서도 이쪽 길이 맞는 거 같아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걱정이었는데, 다행히도 열려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장도로가 나온다. 차가 쌩쌩 달리는 74번 도로를 따라 꽤 긴 거리를 걸어나간다. 도중에 발견한 헤맷 호수 옆에 마트가 보인다.

"좀만 쉬었다 가자, 좀만 가면 된대"

먼저 마트 앞 의자에 배낭을 내린 형이 쉬어가자 한다. 히맨 또한 내색은 안 하지만 분명 시원한 음료 생각이 간절하다. 커다란 냉장고 안의 많은 음료 중 무얼 마실까 한참을 고민하다 집어 든 스타벅스 프로틴. 흡족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꽤 맘에 드는 모양이다.

GOPR6303.JPG
GOPR6328.JPG

운행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도로 운행이 끝나자 땡볕에 그늘 하나 없는 끝없는 오르막이 이어진다. 오르고 또 오른다.


'역시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더니......'


'왜 하필이면 그 구간은 불이 나가지고 돌아가게 만드는 거야!'

좋다던 컨디션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슬슬 지쳐가면서 짜증이 밀려오는 듯하다. PCT는 히맨에게 이제 집이다. 집을 떠나니 집이 편한 걸, 그리고 집 떠나면 개고생인걸 알게 된다. 개고생의 시작이다. 히맨은 이 땡볕에서 빨리 벗어나고픈 욕심에 속도를 내며 멈추지 않는다.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어 보이는데도 멈추지 않는다. 악을 쓰며 오르는 모습이다.

어느새 형은 뒤쳐지면서 보이지 않게 됐다. 히맨은 걱정이 되는지 중간중간 바닥에 스틱으로 방향을 알려준다. 스틱으로 화살표를 그리고 한 단어를 쓴다.

'빨리'

몇 백 미터를 지나 또다시 뒤를 돌아보더니, 형이 보이지 않자 다시 쓴다.

'좀......'이라고 쓰기 시작했을 때 형이 히맨을 부른다.

"이 길이 맞는 거야?"

'좀만 더'라고 쓰려다만 글씨를 발로 문지른다.


"맞아요 여기. 다른 애가 쓴 것도 있잖아."

두 사람 모두 아직은 길 찾는 일이 서툴다. 다만 먼저 지나간 다른 하이커들이 남긴 화살표가 많은 도움을 준다.

형은 다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화살표를 바닥에 그려가며 계속해서 걸어나가는 히맨. 어느덧 보이기 시작하는 화려한 별장들이 마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린다.

형이 계속 보이지 않게 되자 대안길의 끝을 약 2km를 남겨두고 멈춰 섰다. 배낭을 내리고 앉아 형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형.

"18시 10분이 지나가는 상황인데 알아서 잘 올 거라 믿긴 하지만...... 늦어서 중간에 히치하이킹을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해가 점점 기울고 있고, 물도 모자라는 상황이라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네요. 3분만 더 기다려보고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알아서 잘 찾아오겠지?'

대안길의 끝에 다다랐을 때, 형은 옆에 없다. 그리고 히맨 또한 길을 잃는다. 아이딜와일드 마을에 들어온 것 같기는 한데,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 한다. 지금까지 길잡이 역할을 해준 하프마일 PCT 어플은 더 이상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끝까지 오면 다시 길이 나타날 줄 알았는데......'

‘배고픈데 혼자 밥이나 사 먹을까??’

히맨이 식당이 있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간판 아래의 작은 글씨를 보더니 눈이 커진다.

'어서 오세요'

분명 또렷한 한글이다.

하지만 영업 종료시간이 16시라고 쓰여있는 문은 닫혀 있다.

'아......'

이미 영업이 끝난 불이 꺼진 식당. 아쉬운 마음에 창에 얼굴을 들이대며 안을 살핀다. 창 너머로 카운터 쪽에 서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우체국 가는 길이라도 물어보자'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또 두드린다. 전혀 알아차리지 못 한다.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다섯 번째였을까 그제야 여자는 뒤돌아 히맨을 발견한다. 문이 열렸다.


"영업 끝났어요"

영어로 영업시간이 끝났다고 하며 다시 문을 닫으려 하자, 문을 잡으며 급히 물어볼 게 있다고 한다.


"우체국 가는 길을 알고 싶어요."

'길이라도 좀 알려줬으면......'


"혹시 한국 분이신가요?"

'확실히 한국 사람이 맞는 거 같은데......'

돌아온 그녀의 대답은 분명 한국말이다. 얼마 만에 듣는 한국말인가!

물론 형과 한국말로 대화를 하기는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듣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녀는 약간 경계하는 듯한 말투로 건조하게 길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이내 곧 식당 안으로 히맨을 들인다. 히맨은 들어서자마자 PCT를 걷고 있으며 형과 헤어져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사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돌아온 아주머니의 한마디.


"물 좀 줄까요?"


CS0157 to Mt. San Jacinto State Park Idyllwild CG

by 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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