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걸을 수 있겠구나
"필요한 거 없어요? 화장실 써도 되고 음식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해요."
"영업이 끝나서 따로 뭐 해줄 건 없고, 토스트라도 해 줄게요."
"마실 건 뭐 줄까요? 주스?"
"혹시 우유 있나요?"
미리 우유를 따라놓고 한 손에는 나이프를 든 채 타이밍을 기다린다. 2분 30초가 지나자 덜컹하며 식빵을 뱉어낸다. 항상 토스트기를 노려보며 놀라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지만, 언제나 어깨는 반사적으로 들썩인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식빵 하나를 재빨리 꺼내 딸기잼을 바른다. 바로 치즈를 올리는데, 껍데기가 벗겨진 면을 딸기잼이 바른 면과 일치시킨다. 그리고 나머지 껍데기를 벗겨내는데, 치즈가 아니라 액정필름이라면 기포 없이 완벽하게 밀착될 듯한 섬세한 작업이다. 이제 남은 하나의 식빵을 꺼내 피넛버터를 바른다. 피넛버터는 땅콩 알갱이가 씹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피넛버터를 바른 식빵을 뒤집으며 덮는다. 이 모든 작업은 식빵의 온기가 식기 전에 최대한 빨리 해야 한다. 우유를 미리 따라놓고, 치즈 껍데기를 미리 절반 벗겨놓은 수고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한 입 베어 물고서 우유를 들이키며 토스트를 녹이 듯 음미한다. 미소.
- 언제나 살짝 귀찮은, 그렇지만 의식과 같은 아침식사 中.
시원한 우유! 그리고 토스트!
히맨의 마음을 읽은 건지 토스트의 한 쪽에는 딸기 잼, 한쪽에는 피넛버터가 발라져 있다. 히맨의 얼굴에 만족감 충만한 미소가 절로 번진다.
"한국인이 PCT 걷는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주변 사람들이 PCT 걷는 사람들한테 식당 홍보하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아, 그러셨어요? 어디서 들으셨어요?"
'벌써 유명해진 건가? 이 동네 참 소식이 빠르구나.'
"어디 인터넷에서 본 거 같더라고요."
"잘 먹었습니다!"
오랜만에 먹은 제대로 된 간식이었다.
"더 필요한 건 없어요?"
"저, 혹시 컴퓨터 좀 쓸 수 있을까요??"
계산대에 있는 포스 용 컴퓨터를 내주신다. 언제 마지막으로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구형 윈도우가 설치되어 있는 컴퓨터. 아이튠즈 동기화를 다시 한 번 시도해본다. 이번에는 호환 문제로 프로그램을 설치할 수가 없다. 동기화가 되기 전에는 전화를 쓸 수 없다. 원래도 애플을 좋아하지 않는 히맨, PCT가 끝나면 더 싫어할 듯 싶다. 이 전화 과연 쓸 수 있을까?
아주머니와 잠깐의 대화를 나누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후에야 아직 만나지 못한 형이 생각난다.
'형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식당서 형을 기다릴 수는 없는 상황.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어서 오늘 밤을 지낼 캠핑장을 찾아야 하는 상황. 문은 닫았겠지만 일단 우체국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아주머니는 각종 젤리와 고구마까지 챙겨 주신다.
'우체국에 가면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잘 하면 형을 바로 만날 수도 있고......'
"타고 가지? 걸어가는 게 원칙이긴 하지마는......"
아주머니는 차로 태워 주겠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니 걷겠다고 한다. 하여간 요령이라고는 없다. 성함이라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성함을 여쭤보고 함께 기념사진도 찍는다.
아주머니와 헤어지고 우체국을 향하는 히맨의 얼굴이 미소와 함께 잔뜩 상기되어 있다. 고프로를 꺼내 든다. 아마도 그 느낌, 고마움을 간직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길이라도 물어보려고 문을 두드렸는데요, 한국분이셨어요!"
"간식까지 챙겨주셨습니다. 물도 챙기고 인터넷도 쓰게 해주셨어요. 물론 인터넷이 잘 터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 좋습니다. 일단 우체국까지 이동거리가 얼마 안 된다고 해서 우체국으로 이동 중입니다. 거기서 형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주머니가 알려 주신대로 길을 나섰으나, 금세 멘붕이 온 히맨. 혹시나 해서 아주머니의 설명을 녹음까지 했는데 들으면서도 감을 못 잡고 있다. 참 길을 못 찾는다.
길 가던 남자에게 물어 겨우겨우 우체국에 도착. 역시 영업시간은 지났고, 안쪽에서는 정리 중인 직원들이 보인다.
'가까운 캠핑장이라도 물어봐야겠다.'
고프로를 켜둔 채 문을 열고 다가온 여직원과 대화를 시작한다. 한번 듣고는 분명 기억하지 못할 테니 음성을 반복해 들으면서 길을 찾을 생각인 것 같다.
"이미 5시에 문을 닫았어. 내일 7시 30분에 다시 오렴"
혹시나 했지만 역시 미국은 참 철저한 거 같다.
"네 알아요. 혹시 여기서 가까운 캠핑장 아세요? 오늘 머물 데가 없어서요......"
'상자는 내일 받아도 되니까, 캠핑장이라도 좀 알려줘'
"혹시 여기 네 상자가 있니?"
"네"
최대한 난처한, 불쌍한 표정을 짓는 히맨. 그러지 않아도 이미 히맨은 누가 봐도 불쌍해 보인다.
"오~저런...... 이름이 뭐니?"
전략이 통한 듯하다!
"H.E.E.N.A.M. 희남이예요!"
"H.E.E.N.A.M.?
오케이, 잠깐만 기다려. 물건 찾고 캠핑장에도 데려다줄게!"
"오! 정말요?! 고마워요!"
직원을 따라 우체국으로 들어서면서 고프로를 자신에게 돌린다. 속으로 "예쓰~!"를 외치는 듯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히맨. 하루에 이런 멋진 경험을 두 번이나 하게 되다니!
한 3분 정도 지났을까, 창고에서 박스를 들고 나온 직원은 히맨을 자신의 차에 태운다.
"오늘 하이킹 어땠어?"
"정말 힘들었어요. 오늘 완전 롱데이였어요.
아침 7시 반부터 지금까지 계속 걸었거든요."
"저런, 정말 힘든 날이었구나!"
직원은 아이딜와일드에는 두 개의 캠핑장이 있다고 설명한다. 첫 번째 들른 캠핑장. 칠흑같이 어두운 캠핑장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자도 괜찮아요"
히맨은 자기 때문에 퇴근하고 쉬지 못하고 운전을 하고 있는 여직원에게 미안한지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고 선뜻 이야기하지 못한다. 혹은 짧은 영어 실력 때문일지도.
"여기는 아닌 거 같아. 다른 데로 가보자."
당연하다는 듯 바로 다른 캠핑장으로 차를 돌리는 여직원에게 참 고마울 뿐이다. 차는 또 다른 캠핑장 안으로 진입한다. 불빛이 가장 먼저 보이고, 텐트, 그리고 또 다른 외국인 하이커 무리가 보인다. 차가 사이트 앞에 멈춰 선다. 지나가던 한 하이커가 조수석에 타고 있는 히맨을 알아본 듯 말한다.
"네 친구가 너를 찾으러 갔어"
"정말?"
'형이 여기 있는 건 확실한 거 같네. 드디어 찾았네.'
"여기가 맞는 거 같아요. 태워줘서 정말 고마워요!"
땡큐를 연발하며 차에서 내린다. 형은 히맨을 찾으러 가고 없다. 짐만 한편에 놓여 있다. 외국인 하이커들은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며 떠들썩하게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히맨은 그 무리에서 떨어져 앉아 그를 기다리다 이내 텐트를 친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는가 싶더니 형의 배낭에 달린 텐트를 떼어낸다. 그리고 텐트를 치기 시작한다. 출발한 후 지금껏 보지 못 한 둘의 행동이 무언가 낯설다. 히맨 또한 자신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형의 행동이 의외라는 표정 뒤로 묘한 기분을 느낀다. 철저히 개인적이기를 원했던 히맨이었기에. 텐트를 치며 생각한다.
'의왼데?'
'믿고 걸을 수 있겠구나'
형은 한참 뒤에 되돌아 왔다. 둘 모두 서로가 길을 잃은 줄 알고 걱정했단다.
"형, 어떻게 된 거예요~"
"우체국으로 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서 길 잃은 줄 알았어."
히맨이 식당에 머물고 있을 때 우체국에서 기다리면서 엇갈린 것이다. 우체국으로 갔을 땐 이미 형은 캠핑장에 가 있었고.
"저도 형이 길 읽은 줄 알고...... 그래도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고생했어요!"
"저기 모여있는 애들한테 너 봤냐고 물어봤는데 못 봤다고 하고,
알아서 찾아올 거라면서 계속 장난치길래
'나 지금 진지하다, 내 친구가 없어졌다'고 화냈잖아."
걱정했다며,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형의 모습이 참 낯설다.
히맨이었다면 그냥 '오겠지~'하며 피곤함에 텐트 치고 바로 누웠을 거다. 말로만 걱정을 하며, "내일 찾아봐야겠습니다."하며...... 아마도 그런 마음이 미안했기에 텐트를 대신 쳐주었는지도 모른다.
"형, 텐트 어디 칠지 확실히 알 수 없어서 팩은 아직 안 박았어요."
"이쪽이 낫겠죠?"
사이트를 제대로 구축하고 나서야 긴장이 조금 풀어진다. 배도 고파진다.
"제가 마실 것 좀 사 올게요. 마트가 어디예요?"
깜깜한 캠핑장은 길도 잘 보이지 않아 제대로 찾아올 수 있을지 걱정은 되지만 기꺼이 길을 나선다. 혹시라도 길을 잃을까 주변 사진을 찍으며 이동한다. 그제야 캠핑장의 이름을 보게 된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운행 종료 보고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캠핑장을 찾느라 급한 마음에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마을의 중심이 눈에 들어온다. 거의 모든 건물들은 불이 꺼진 한적한 마을의 밤 풍경. 다행히도 아직 불이 켜진 가게가 있다. 과자들과 맥주 그리고 콜라가 든 봉지를 들고 텐트로 돌아가는 길. 길치답게 역시 잠깐 옆길로 새기도 하고 캠핑장에 들어서서도 사이트를 찾아 헤맨다. 그래도 이 정도면 무난하게 잘 돌아온 편.
둘은 한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바로 옆 사이트에서 떠들썩하게 맥주파티를 벌이던 하이커들도 모두 각자 텐트 안에서 잠에 든 듯 고요하다. 내일은 하루를 쉬며 예비일을 가지기로 한다. PCT 출발 이후 처음으로 하루 종일 쉬게 된다. 그야말로 롱데이였던 오늘을 생각하면 그 정도 보상은 받아도 될 것 같다.
테이블에 고프로를 올려놓고 밤하늘 사진을 몇 장 찍은 히맨은 텐트로 들어간다.
'오늘 달이 참 밝다!'
~Mt. San Jacinto State Park Idyllwild CG
by 히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