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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에요?

나는 29살에 미국에 왔어요.

by 히맨
PCT 첫 예비일이다.


버라이어티 했던 어제를 생각하면 늦잠을 잘 법도 한데 평소와 다르지 않게 6시에 눈이 떠진 히맨. 그런 자신이 신기한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연스레 시리얼에 우유를 붓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서는 납득이 가는 듯한 표정으로 바뀐다.

어제 받은 재보급 상자를 뜯어보니 생각보다 양이 많다. 그래도 LA에서 출발 전에 일일이 계산하여 보내 놓은 식량들이 예측한 소요일과 일치하는 것이 괜히 기분이 좋은 듯하다. 다음 보급지까지 소요될 식량을 계산하고 남는 식량을 다시 상자에 넣는 작업을 시작한다.

형이 다른 포인트로 보낼 식량과 개인 짐 박스를 히맨의 텐트 앞에 내려놓는다.


'식량 정리하는 것도 찍어놔야지!'


"다음 재보급인 빅베어 시티까지 가기 위한 식량을 세팅하고,

나머지는 3주 정도 뒤인 포인트에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빅베어 시티까지 152.8km에 플러스 8km 총 160km. 총 5일, 길어지면 6일까지 예상하고......

근데 5일 차가 일요일이라서 우체국이 문을 열지 않아요."


"원래는 밥을 10개 챙겨야 하는데 시리얼로 아침을 두 번 정도 해결하고, 밥은 8개만 챙기겠습니다.

점심은 행동식으로 대체합니다."


비워졌던 상자는 다시 새롭게 채워져 다른 재보급지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겠지. 그땐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으려나?


"오늘은 관광 모드입니다."

"오늘은 충분히 즐기고 쉬기로 했습니다. 정리를 하고 씻고 돌아다녀 봐야 할 거 같아요. 작은 마을인데, 재미있는 동네인 것 같아요. 인구수가 4000 조금 넘는 거 같더라고요."

방수 주머니인 작은 드라이색을 핸드백 삼아 한 손에 들고 마을을 둘러본다. 알록달록 아기자기한 건물들,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평화로운 분위기가 히맨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저녁까지 전부 매식으로 할 것 같습니다. 조금 부담이 되지 않을까 싶긴 한데, 또 언제 이래 볼까 싶어요.

일주일은 또 거지 생활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충분히 즐기고 쉬고 가겠습니다. 동네가 예뻐서 관광 좀 하고 가겠습니다."

빨간 주전자 간판이 인상적인 레드 케틀(Red Kettle) 식당의 테라스. 거리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은 둘이 햄버거와 치킨 스테이크를 각각 시켜 나눠먹는다. 포크와 나이프가 좌우로 크로스되며 접시와 입 사이를 오간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시리얼을 먹는 히맨을 본 게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며칠 굶은 듯 정신없이 먹는다.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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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도서관으로 향한다.

'이런 시골마을에도 이렇게 좋은 도서관이 있구나.'

도서관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벽에 기대앉는다. 둘 뿐만 아니라 다른 하이커들도 도서관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벽에 기대앉아 있다. 모두들 컴퓨터를 이용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운 누군가와 연락을 하거나 자신의 기록을 정리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냥 보기에는 마치 길거리 노숙자와 다를 것이 없다.


도서관의 컴퓨터는 워너스프링스에서 썼던 그것보다는 훨씬 쓸만하다. 히맨은 역시나 앉자마자 아이폰 동기화를 시도하지만 아이튠즈를 설치할 수 없어 결국 또 실패하고 만다.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지금껏 찍은 사진들을 백업하고 있고, 형은 서가 근처의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아이폰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뭐해요?"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히맨이 형에게 묻는다.


"PDF 지도 전부 받았어."

다운받은 PCT PDF지도를 보여준다. 이미 히맨의 외장하드에 들어있는 것과 같다.


"양이 많은데 그래도 꽤 빨리 받았네요?"


그때 들려온 목소리.


"한국 사람이에요?"

뒤편의 한 여자가 둘을 부른다.


"네!"

놀라면서도 반가운 마음에 재빠른 대답.


"일단 나와봐요."

놀랄 겨를도 없이 둘은 불려 나간다.


미국 산골의 한국인 아주머니와 PCT 하이커 둘이 도서관 앞 벤치에 마주 앉았다. 둘은 우리가 서울에서 온 PCT하이커이며, PCT가 무언지 열심히 설명한다.


"여기는 한국 집이 네 집 있어요.

여기는 한국사람 모르는 데예요. 여기를 어떻게 알고 왔어요?"


"여기가 PCT 코스 중에 하나라서요. 지금 저 산 위에서 내려왔는데......"

둘은 손가락으로 뒤편으로 보이는 산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야~ 대단하다!"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이곳은 유명인들의 별장이 많은 곳이라는 소개부터, 아트스쿨에 다니는 한국인 학생들을 위해 집으로 초대해 설날 떡국을 끓이고 많은 음식들을 차렸는데 아무도 오지 않아서 전부 버려야 했다는 서운했던 이야기까지 줄줄 나오는 걸 보면 참 사람이 그리우셨던 모양이다.


"여기서 필요한 거 뭐 없어요?

이따가 저녁에 내가 저녁 해줄게.

돼지 불고기 사다 놓은 거 있다."


"어우~ 맛있겠다! 허허허~"

오래간만에 한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형은 매우 신나 보인다.


"안 그래도 저희가 계속 고기가 먹고 싶었거든요."

역시 기대하고 있던 히맨이 덧붙인다.


"둘이 먹으면 될 거야~ 한국 상추 넣고......

먹여주고 저녁에 캠핑장으로 데려다 줄게요.

이따 와요. 이따가 6시 반에 도서관 앞에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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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의 차가 집 앞에 선다. 집 앞에 새워진 우편번호를 들고 있는 곰 조각상이 가장 먼저 맞아준다.

"미국 문화는 집에 초대하면 먼저 집구경을 시켜줘요. 이리로 와 봐요."

드넓은 다락방은 친구들과 단체로 놀러 와서 둘러앉아 수다를 떨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밥하는 동안 TV 보고 있어요. 한국 방송 다 나와."

오랜만의 한국 방송이 왠지 모르게 낯설다. 히맨은 와이파이가 가능한지부터 확인하지만, 시골이라 그런 거 없다고 답하시는 아주머니는 도서관까지 차를 타고 나와 이메일을 확인하는 정도라고 하신다.

음식이 다 준비된 것 같다.


맛있는 김치찌개!
그리고 고추장 돼지 불고기!



그 외에도 식탁 가득 다양한 채소와 반찬을 차려주셨다.


"잘 먹겠습니다!"

배가 터지도록 음식을 삼키며 생각한다. PCT를 걸으며 이런 한식을 차려먹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적어도 5개월간 PCT를 걸으며 음식에 대한 맛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히맨이다. 식량을 구매할 때도 가장 먼저 칼로리 그리고 탄수화물과 지방을 우선순위로 골랐던 그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잘 먹어도 되는 건가?'


배가 빵빵해질 정도로 과식을 한 히맨. 아마도 소화제를 먹어야 될 것 같다. 히맨은 어머니가 챙겨준 소화제를 먹을 일이 절대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커피 한 잔씩 할래요?"


"나는 29살에 미국에 왔어요.

29살에서 모든 게 정지되어 있어."


"한국 가니까 어머 국제극장 없어졌어,

화신백화점도 없어졌어, 미도파 백화점도 없어졌어......

그니까 나는 공중전화 20원에 짜장면 1200원에서 멈춰있기 때문에......

어머 세상에~ 그 옛날 장충동 거리가 이렇게 좋아졌어......"

89년에 미국에 오셨다는 아주머니는 지금의 히맨과 다르지 않은 29살 소녀 같았다. 그녀가 26년 전에 멈춰있듯, 히맨도 26년 후의 PCT를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기억할까? 그 기억에 머물러 있을까?


"혼자서 집에 계시면 무섭지 않으세요?"

곰이 산에서 내려와 가끔씩 노크를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에 궁금해진 히맨이 묻는다.


"네 발 달린 짐승보다 사람이 더 무서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아주머니의 대답에 히맨은 "아!" 하더니 잠시 생각에 잠긴다.


"저희 같이 사진 한 장 찍어요."

헤어지기 전 기념사진을 찍자고 하니 이대로는 찍을 수 없다며 옷을 챙겨 입고 머리를 만지는 소녀 같은 모습이 참 순수해 보인다.

다시 셋은 차를 타고 둘의 텐트가 있는 캠프장의 사이트 앞까지 이동한다.


"먼저 들어가요. 텐트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손수 챙겨주신 고추장과 김 등 각종 식량을 챙겨 들고 차에서 내린다. 히맨은 헤어짐이 참 아쉬운 눈치다. 아쉬운 건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그렇게 헤어진다.


1. 미국 와서 정말 많은 도움과 격려를 받고 있다. 한국에 있었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내 생각과 행동반경, 능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갇혀서,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다면, 지금도 나는 제자리였을 거다.

지금 내 앞에는 불확실한 미래와 내 능력의 한계를 벗어 나는 일들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나 혼자서 매달려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주변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일주일도 안돼 불가능함을 깨닫고 포기했을 것이다.

정말 따뜻한 시간,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이런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포기는 없다!!'
내일부터 다시 달려 보자!!

2. Idyllwild 최고!!

- 히맨의 PCT다이어리 PCT DAY#13 中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지금 히맨이 이렇게 텐트 안에서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고맙습니다!"


Mt. San Jacinto State Park Idyllwild CG(271.41km) : 0km

by 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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