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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다

똑같은 지겨움이 느껴진다.

by 히맨
"아이딜와일드에서 좋은 추억을 쌓고 돌아갑니다."


캠핑장을 나서는 히맨이 화장실 앞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웃는다.

'SHOWER TOKENS'

(샤워 토큰)

먼저 떠난 하이커들이 다음 하이커들을 위해 샤워 토큰을 기부하고 간 듯하다. 비싼건 아니지만 샤워하는데 돈을 쓰기는 아까웠고, 무엇보다 샤워토큰으로 바꾸는 게 귀찮아 대충 화장실 세면대에서 씻은 히맨은 미련없이 캠핑장을 나선다.


09시 17분. 히맨은 벌써부터 지친 것 같다. 식량을 보급받으면서 배낭이 무거워 지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분명 아침도 어제 아주머니께서 챙겨주신 주먹밥과 라면스프를 탄 국물 그리고 사과까지 정말 잘 먹었는데...... 설마 모자랐던 건가?


디어 스프링스(Deer Springs) 트레일 도중 수어사이드(Suicide) 트레일로 진입하는 갈림길. 일명 자살 바위라 불리는 수어사이드 락(Suicide Rock)을 한 번 가보기로 한다. 형은 배낭을 근처에 내려놓고 가벼운 몸으로 트레일을 시작한다. 반면 히맨은 참 융통성이 없다. 고생을 사서 한다.

오늘따라 힘을 쓰지 못하고 힘겹게 발을 내딛는다. 아주 지친 표정으로 도착해서야 배낭을 내린다. 자살 바위가 보이는 곳에서 행동식을 입에 문 채 셀카를 찍는 히맨.

경치를 즐기며 휴식을 취한 후 다시 형이 배낭을 내려놓은 지점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도착하니 이제 막 길에 들어선 외국인 하이커 커플이 보인다.


"이거 네 배낭이야?"


"응"

배낭을 들어 올리며 형이 대답한다.


"휴~ 깜짝 놀랐잖아!"

알고보니 사람은 없고 배낭만 덩그러니 있어 무슨 큰일이 난 줄 알았던 모양이다. 듣고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살 바위'가 있는 곳이니까.


큰 나무들과 바위가 많은 트레일은 오늘따라 급경사가 많아 체력 소모가 많다. 트레일 주변의 랜드마크인 3300m의 샌 하신토 산(Mt. San Jacinto)에서 내려온 다른 하이커들이 보인다. 히맨도 초반에는 올라볼까 잠깐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흘러 도착한 스트로베리 정션에서 디어 스프링스 트레일이 끝났다. 그리고 온 PCT. PCT로 다시 돌아왔다.

"집 나갔다 다시 돌아온 기분인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PCT 300km 지점을 지나며 고프로를 켜는 히맨. 앞으로 100km마다 계속 찍기로 한 것 같다.


"이제 4천 킬로미터만 가면 됩니다. 얼마 안남았죠?"


아무렇지 않은 듯, 별거 아닌 듯 말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을거다.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는 거리. 앞 길이 까마득 하기만 하다. 처음으로 만난 듬성 듬성 쌓인 눈들을 지나자 PCT 길임을 알리는 브라운 스틱이 보인다.

"드디어 만났어 브라운 스틱!"

지도 상으로 PCT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표식이 없어 불안했던 히맨은 거의 3일 만에 다시 만난 PCT 브라운 스틱이 매우 반가운지 스틱을 쓰다듬듯 만지며 인사한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도 잠시, 목표 사이트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힘이 드는 건 여전하다. 지그재그로 계속되는 스위치 백 오르막은 끝이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는다. 뒤에서 형이 한 마디한다.


"지겹다"


난 지친다고 했고,

넌 내가 변했다고 했다.

마음이 변했다고.

그래, 변했다. 그리고 원망스러웠다.

계속해서 대놓고 오르락 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태우듯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네가.

변하지 않으면 내가 망가질 것 같았다.

- 함께 내려가던 전철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中

히맨의 표정에서 똑같은 지겨움이 느껴진다. 계속되는 지그재그 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에 지쳐가는 것 같다. 결국은 예정 사이트 4~5km 이전의 마른 계곡 옆 모래 밭에 자리를 잡으며 운행이 마친다.

벌써 PCT를 걷기 시작한지도 2주. 그리고 어느새 또 하루의 일정이 끝나간다. 언제나 그렇듯, 지나고 나면 시간 참 빠르다고 느낀다. 동시에 걱정했던 것보다 별거 아니었다는 것도 느낀다.


'이제 이런식으로 9번(?)만 더 하면 PCT는 끝나겠지?'

"수고했어!"


"고생하셨습니다!"


"오늘도 고마워!"


약간의 근육통증이 느껴지는지 히맨은 처음으로 타이레놀을 하나 먹고, 자리에 누운채로 고프로를 들어올린다.

오늘 운행이 조금 힘들긴 했습니다. 어제 예비일 가지면서 좀 푹 쉬었어야 했는데, 뭔가 일이 많았죠. 장도보고 초대받아서 저녁도 먹고 하면서 일정이 좀 늘어져서...... 정리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 12시 넘어서 취침을......
오늘 운행을 하면서 좀 너무 힘들었던건지 계속 반복되는 환경에서 어느정도 적응이 된건지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생각없이 걸었던 것 같은데요. 다만 생각을 하지 않고 있구나 하는 생각과, 치맥을 하고 싶다는...... 치킨 먹고 싶어요! 그리고 빨리 끝내고 맛있는 저녁을 먹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둘다 지쳐있는 상태에서 거의 터벅터벅 걸어갔는데요. 뒤에서 희종이 형이 "아~ 지겹다"라고 얘기를 했는데요. 그말에 되게 공감이 가더라고요.
사실 솔직히 말하면 오늘 같은 코스로만 140일 이상 걸어야 된다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것 같고 계속 해야 될 이유를 찾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일은 또 새로운 마음으로 어떤 환경이 펼쳐질지 기대를 하면서 내일을 위해서 푹 쉬도록 하겠습니다.
- 영상 다이어리#14 中


Mt. San Jacinto State Park Idyllwild CG to Snow Creek Trail

by 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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