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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많이 챙기지는 않았습니다.

진짜 사막이 시작된 건가?

by 히맨

"다음 워터 포인트는 19km 지점에 있을 것으로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


"물을 많이 챙기지는 않았습니다.

약 700ml 정도 챙기고 출발하면서......"

PCT 첫날, 아무런 감이 없어 3리터 수낭과 날진 수통에 주유소 마트에서 구입한 물을 가득 채웠던 히맨. 2주가 지난 지금, 하루하루 어느 정도의 물이 필요한지 감이 잡히기 시작한다. 원래 물을 많이 마시기보다 적게 자주 마시고, 목마름을 잘 참기도 하는 히맨은 오늘 운행에도 자신감을 보인다.


출발 약 2주 만에 200 마일을 돌파한다. 그러니까 320킬로미터를 걸었다. 그리고 반대로 캐나다에서 출발한 PCT 하이커에게는 멕시코 국경까지 이제 200 마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히맨이 형의 기념사진을 찍어준다.

"찍어줄까?"

형이 묻는다.


"아뇨, 괜찮아요."

기록을 남기고 싶을 만도 한데 왜 거절하는지는 모르겠다. 갈 길이 멀기에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걸까? 그래도 이런 것들이 순간순간 힘이 될 텐데...... 아니면 반대편의 2450이라는 숫자를 본 후 떠오른 생각이 더 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좋겠다.'

'200마일을 남겨놓았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런데 오늘 정말 뜨겁다.


"11시 45분입니다. 계속 지그재그 내리막의 반복이고요. 햇빛이 엄청 강하고......

물이 저나 희종이 형이나 거의 바닥난 상태라서......"


"지기 엔 베어(Ziggy and the Bear's)라는 엔젤이 머물고 있는 그곳에서 머물게 될 것 같습니다.

물도 있고요, 인터넷을 쓸 수 있는 것을 봐서 좋은 곳으로 예상됩니다."

19km를 걷는 동안 어떻게 그늘이 하나도 없을 수 있는 건지...... 둘은 점점 지쳐간다. 하지만 애플리케이션 상의 급수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힘을 내어본다.

"드디어 워터 포인트에...... 물이 충분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멀리서 여러 하이커들이 몰려 있는 것을 발견한 히맨이 말한다.


드디어 도착. 물이 펑펑 솟는 수도 시설이다. 하이커들이 물이 솟아오르는 급수 시설 앞에 모여 시원한 생명수를 즐기고 있다.

'휴~'

일단 쉴 곳을 찾아 배낭을 내리려 사방을 둘러보지만 급수지 주변에도 그늘은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뜨거운 땡볕 아래 배낭을 내린다. 히맨은 배낭을 풀자마자 뒤 이어 걸어오는 형을 고프로에 담는다.


"I made it!

I need water~

Oh my god! no shade!"


많이 기쁜 듯한 형. 형은 자신의 물에 대한 간절했던 경험에 대해 몇 번씩 이야기하곤 했다.

GOPR8922.JPG
GOPR8923.JPG

히맨은 얼마 남지 않은 파워에이드 원액을 탄 뜨겁고 빨간 물을 들이켜고 빈 수낭에 시원한 물을 담는다. 다시 파워에이드를 짜 넣는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다른 하이커들도 이곳에서 생기를 찾았는지 밝은 모습이다. 다만 그늘이 없어 오래 쉬지는 못할 것 같다. 딱 한 곳, 수도 옆 커다란 바위 아래 그늘에 하이커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아니 그늘보다는 그림자라는 표현이 맞겠다. 이내 하이커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자리가 난 그곳에 기대앉는다.

바위에 등을 기대 쭈그려 앉은 둘. 히맨이 고프로가 달린 스틱을 들어 올린다.

물만 보충하고 잠깐 쉬고 가려던 계획과는 달리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쉬면서 마신 물만 거의 500ml가 넘어간다. 어제는 운행 내내 마신 물이 500ml였던 히맨이다.

아쉬움 가득한 몸을 힘겹게 일으켜 포장된 길을 따라 계속 운행을 이어간다. 지기 엔 베어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거리다.


"물 보충하니까 어때요?"

길을 나서며 히맨은 마치 자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형에게 묻는다.


"살 것 같아~!"

"무적이야 이제! 다 할 수 있어~!"

"희남아 고마워~!"

운행 보고 중인 히맨의 뒤로 팔을 크게 돌리며 형이 외친다.


"약 2시간 반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개의치 않으며 운행 보고를 마무리하는 히맨.

포장 구간을 벗어나자 길은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밭이다. 둘의 한걸음 한걸음이 무겁고 힘들어 보인다.


'진짜 사막이 시작된 건가?'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도중 트레일 옆 아주 작은 그늘을 찾아 쭈그려 앉아 쉬고 있는, 조금 전 급수지에서 만난 여자 하이커가 보인다. 둘이 급수지에 도착하고 얼마 안 돼 먼저 출발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만난 걸 보면 상당히 힘든 것 같다. 지친 기색이 선글라스로는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온 몸이 쳐진 모습이다.

둘도 많이 지쳤다. 물을 마시며 그렇게 긴 시간을 쉬었는데도 힘이 드는가 보다. 급수지에서 출발해 약 5km 지났을까. 겨우겨우 찾은 나무 그늘 아래 주저앉는다. 아까 보충한 물은 어느새 따뜻해져 있다.

'지기 엔 베어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왜 이리 길고 힘들게 느껴질까? 이제부터 진짜 사막 운행이 시작될 텐데......'


'내일 운행도 이렇게 그늘이 없으면 어찌해야 하지??'

"뜨거울 때를 피해서 야간 운행을 하는 것도 고려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본격적인 사막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걱정을 하며 운행하는 도중 나타난 굴다리. 기둥에 PCT 마크가 붙어있다.

'그냥 길 표시구나'

처음 보는 낯선 위치의 표식이라 뭔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다가가지만 평범한 길 표시다. 첫 번째 다리를 지나 두 번째 다리로 들어선다. 다리 밑 그늘에 웬 흰 박스 두 개가 놓여 있다.


'응급처치 박스인가?'


그냥 지나쳐 가려다 궁금함에 가까이 다가간다.

히맨이 상자의 뚜껑을 들어 올린다.


"대박!!!"


이건 마치 말 그대로 오아시스가 아닌가!! 얼음이 가득한 상자 안에 탄산음료와 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건 남겨야 해!'

고프로가 깜빡인다.

"오아시스가 있었어요!"

"몇 시야, 15시쯤 되는데......"


"아, 몰라 마셔!"

형은 벌써 음료를 들이켜고 있다. 둘은 이렇게 먹다 탈 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셔댄다. 히맨은 벌써 1.5L째 물을 마시고 있다. 한 캔을 정신없이 마시고 난 후에야 벽에 붙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온다.

절도 문제로 불가피하게 다른 오아시스를 닫아야 했다며 오히려 하이커들에게 미안하고 하는 엔젤의 메시지.

"진짜 엔젤이라고 할 만 하구나."


히맨은 깊게 감동한 듯하다. 문득 아까 길 옆에서 지친 모습으로 겨우 태양을 피하고 있던 그녀가 떠오른다.


"우리보다 조금 뒤쳐진 여자 하이커가 있는데요, 걔한테도 알려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미 많이 지나쳤네요......"

얼음 상자에서 음료 한 캔을 더 집어 들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도 도착한다. 히맨이 여기 매직이라며 쉬고 가라 한다. 방향을 틀어 다가온 그녀에게서 급수지에서 봤던 활기찬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내 조용한 정적이 흐른다.

검은색 블랙다이아몬드 스틱을 기대 놓고 아이스박스를 열고서 잠시 관찰하듯 내려다보던 그녀는 귤 하나만을 집어 든다.

"몸을 생각하는 건가?"

히맨은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켜도 모자를 상태일 텐데, 예상과는 달라 의외라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내 벌써 두 캔째 마시고도 한 캔을 더 챙긴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now Creek Trail to ZiggyBear(ing)

by 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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