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모습이 전혀 불쌍하다거나 어색하지 않다.
다시 출발. 여전히 뜨거운 모래밭이다.
2km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뭐가 그리 힘든지 발걸음이 이제껏 본 중에 가장 무거워 보인다.
지기 앤 베어를 얼마 남기지 않은 곳에서 방명록이 나타난다. 커다란 돌로 눌러놓은 방명록을 살펴본다. 더위에 지쳐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이글아이 어제 왔다 갔다."
"Life is short......"
"다 덥다는 얘기야~"
덥다는 하소연들로 가득한 방명록.
"먼저 가요~ 쓰고 갈게요"
빨리 가자는 형의 말에 먼저 형을 보낸 히맨이 펜을 든다. 고프로를 켜 둔 채.
"방명록에 글을 남기겠습니다."
"아, 뭐라고 쓰지?"
'Too hot to enjoy'
(너무 뜨거워 즐길 수가 없어)
방명록을 나긴 뒤 다시 몇 백 미터 남지 않은 지기 앤 베어로 향한다. 먼저 출발한 형은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얼마 가지 않아 길이 좀 헷갈리는지 잠시 멈칫한다. 답답할 노릇이다. 다행히 멀리서 보이는 흰색 울타리가 히맨이 가야 할 곳임을 알려준다. 흰색 울타리 안의 PCT 하이커들의 안식처 지기 앤 베어에 도착한다. 먼저 도착한 형은 벌써 배낭을 내리고 쉬고 있다.
도착하자마자 웰컴 드링크로 게토레이를 한 통 준다. 처음 보는 맛의 게토레이, 그제야 지쳤던 히맨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다. 주인아주머니가 부른다. 아주머니는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장소를 안내하고 주의사항에 대해 간단히 안내한다.
"샤워는 저기서 하면 되고, 빨래는 저쪽, 하이커 박스는 저기 있고......"
그리고 간단한 인적사항 - 아니 그보다 방명록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 리스트를 내민다. 트레일 네임을 적는 란은 비워둔다. 아직 히맨이라는 트레일 네임이 낯선 듯.
히맨은 천국과 같은 지기 앤 베어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벽면 게시판에 붙은 안내 및 주의사항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뭐 가져갈 만한 거 업나?'
이것저것 꽤 쓸만해 보이는 것들이 담긴 하이커 박스들이 많다. 하이커 박스를 살펴보다 '야채죽'이라는 한글이 보인다. 한국 야채죽이다!
'분명 윤은중 어르신이 여기 들렀다가 두고 가셨을 거야......'
가져갈까 잠시 고민하는 듯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린다.
"샤워나 해야겠다."
긴 팔 셔츠를 벗는다. 땀에 흠뻑 젖었던 셔츠가 바짝 말라 하얗게 변한 걸 보고는 놀란다.
'우와, 이 정도일 줄이야......'
둘은 샤워 부스에 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가 한 명씩 들어간다. 아이딜와일드 캠핑장의 화장실 세면대에서 대충 닦아내기만 했던 몸을 오랜만에 제대로 닦아낸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은 분명 투명한데 바닥으로 흐르는 물은 시커멓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히맨, 고프로를 들고 구석구석 소개한다.
"완전 좋아요"
"빨래할 수 있게 되어 있고 샤워도...... 처음으로 제대로 한 거 같은데?"
PCT 엔젤이 운영하는 이곳엔 먹을 것, 씻을 곳, 빨래할 곳, 전기, 아 그리고 인터넷도 가능하다. 하여간 없는 게 없다. PCT 하이커에게는 마치 천국 같은 곳.
"형 근데 컨디셔너가 바디샴푸예요? 그냥 머리에 쓰는 거 아닌가?"
"왜 다 샴푸밖에 없지? 그래서 비누 조각 있길래 비누로 씻었는데......"
샤워를 마치고 나온 히맨이 빨래를 널고 있는 형에게 묻는다. 깨끗이 씻지 못한 것 같아 조금은 아쉬운 모양이다.
'미국 사람들은 샴푸는 갖가지 종류로 여러 개 구비해 놓으면서 왜 몸에 쓰는 제품은 항상 없는 거지?'
글쎄 그건 나도 의문이다.
슬슬 배가 고파온다. 오늘 저녁은 지기 앤 베어의 공짜 피자에 1달러 주고 산 망고주스! 식은 피자이기는 하지만 PCT 하이커가 가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망고주스와 함께 정신없이 피자를 뜯는다. 그리고 매우 짠 치킨도 몇 조각 먹는다.
"여기 봐요. 찍고 있어."
오랜만의 푸짐한 저녁을 자랑하고 싶은 것 같다.
"영상이야?"
피자를 한 손에 든 형이 묻더니 콜라도 다른 한 손에 들어 보인다.
"콜라 후원 감사합니다. 항상 콜라 잘 먹고 있습니다."
형은 PCT 기간 동안의 콜라는 자기가 다 사겠다고 한다.
"오늘은 텐트가 아닌 공개된, 오픈된 곳에서 일기를 씁니다."
형이 앉아 있는 바로 옆 의자에 나란히 다리를 쭉 펴고 반쯤 누운 채 영상기록을 시작한다. 텐트 안에서 조용히 홀로 기록하다가 공개된 곳에서 기록을 하려니 어색한 듯 특별한 코멘트 없이 운행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몇 시에 출발하기로 했죠?"
영상을 찍는 중 형에게 출발 시간을 묻는다.
"새벽 4시에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둘은 아까 저녁을 먹으며 뜨거운 태양을 피해 야간 운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지켜질지는 모르겠습니다."
PCT에서의 첫 야간 운행이 계획대로 될 것 같지 않다는 듯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지켜져야지"
그 말을 들은 형이 옆에서 말한다.
"만약에 아침해 뜨면 나는 안 갈 거야. 그냥 아예 밤에 갈 거야 나는"
형이 장난스럽게 말한다.
"우리는 3일 운행으로 빅 베어 시티까지는 무조건 가야 합니다."
빅 베어 시티에서 만나기로 한 한인 산악회 분들과의 만남을 위해 운행을 조정하고 있었다. 약간 타이트한 일정이지만 최대한 맞춰가기로 했다.
"아마도 처음 운행하는 사막이다 보니 약간 시행착오가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우리는 가야 합니다."
"오늘 물을 엄청나게 많이 마셨는데요......"
"뭔가 떠오르지 않네요."
"아무튼 형은 물먹는 하마인 걸로. 나도 적어도 오늘은 물먹는 하마인 걸로."
딱히 할 말이 많지 않은 듯 서둘러 기록을 마무리한다.
오늘 그토록 간절했던 그늘 천막 아래, 의자에 널브러져 있다. 멍하니 앉아 있다 새까맣게 타버린 손이 눈에 들어온다.
'오, 나한테도 하이커 마크가!'
히맨은 PCT를 준비하던 때 하이커 마크라며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시커먼 손등 위로 난 새하얀 스틱 스트랩 자국. 히맨에게도 그 하이커 마크가 생긴 것이다.
여유가 생기니 자신의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가 보다. 하지만 히맨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전혀 불쌍하다거나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노력의 증표인 듯 자랑스럽게 내보인다.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는지 고프로를 들고일어나더니 배낭을 놓은 자리로 향한다. 그리곤 아까 벗어 놓았던 구멍 난 양말에 렌즈를 갖다 댄다.
"15일 찬데, 두 번째 양말 구멍 났습니다."
저것도 참 병이다. 언제까지 저렇게 찍을 수 있을까? 아, 그나저나 이런 추세로 양말에 구멍이 나면 곧 예비로 가져간 양말로는 부족할 것 같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히맨이 고프로로 찍은 사진들을 훑어본다. 그리고 아까 적은 방명록을 원하는 의미와 다르게 남긴 사실을 알게 된다.
'아, 즐기기에 충분히 뜨겁다고 쓰려고 한 건데......'
오늘은 처음 텐트를 치지 않고 카펫 바닥에 매트리스와 침낭을 깔고 눕는다. 해가 완전히 지니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다. 다른 외국인 하이커들과 단체 합숙하듯이 줄지어 누워 있다. 둘 다 못다 한 소통을 위해 아이폰을 들고 만지작 거린다. 그때 아주머니가 야식으로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가져온다.
"땡큐~ 땡큐 베리 머치~!"
"땡큐!"
"아이스크림이에요!"
둘 모두 신이 난 듯 땡큐를 연이어 외친다.
히맨이 다시 눕는다. 자리가 불편한지 눈을 뜬다. 모기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누운 자리 바로 위 지붕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 별이 반짝인다.
'이런 엄청난 하늘을 혼자만 볼 수 없지!'
'바로 공유!'
now Creek Trail to ZiggyBear
by 히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