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랗고 동그란 따뜻한 빛이 둘의 뒤를 비추고 있었다.
일어나기가 싫은 듯 좌우로 뒤척이기만 한다. 약속한 출발 시간이 거의 다 돼서야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컴컴한 어둠 속 조용히 분주한 지기 앤 베어의 풍경. 야간 운행을 준비하는 하이커들은 모두 단잠에 빠져 있는 다른 하이커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헤드랜턴의 빨간 불을 이용하여 짐을 꾸린다. 히맨도 그러고 싶지만 그런 기능이 없는 랜턴이기에 손으로 가려가며 조심스럽게 배낭을 챙긴다.
'나도 빨간 불 나오는 랜턴 쓰고 싶다.'
"04시 10분입니다."
출발하자마자 형이 없어졌다. 먼저 간 줄 알고서는 바로 길을 나섰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되돌아와 화장실을 살핀다.
"다시 돌아와서 화장실 확인해 봤는데 없는 것 같습니다."
화장실에는 없으니 먼저 출발한 듯하다. 멀리서 작게 랜턴 불빛이 보인다.
"저쪽에 불빛이 보이는데 형이 맞나 모르겠네요"
04시 30분. 다시 출발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워진 헤드랜턴의 불빛은 형의 머리에서 빛을 내뿜고 있다.
"야간에는 개인 간격 바짝 붙어서 유지해요."
PCT 첫 야간 운행에 히맨은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다. 앞에서 길을 찾는 일, 뒷사람이 잘 따라오나 확인하는 일이 평소보다 배로 힘이 든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수풀을 헤치다 나무에 걸리거나 드러난 발목이 가시에 찔리는 일도. 캄캄한 어둠 속 예측하기 힘든 위험, 보이지 않는 두려움.
역시나 힘이 드는가 보다. 히맨이 길을 찾아 수풀을 헤치느라 정신없는 사이 형 또한 뒤따라 수풀을 헤치다 다른 길로 들어서 버렸다. 불과 몇 미터 되지 않는 둘 사이의 어둠은 그 거리를 가늠하기 힘들게 했고, 결국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
"형, 오고 있어요?"
히맨이 겨우 빠져나와 멀쩡한 길을 마주하며 뒤를 돌아봤을 때 이미 대화는 불가능한 거리가 되었다. 스위치백 오르막에 접어든 히맨이 길을 내려다보며 고함을 치듯 형을 부른다. 히맨의 고함을 들은 건지 만 건지, 형이 대답을 하는 건지 뭔지도 모르겠다. 결국 형이 올 때까지 길에 멈춰 선다. 랜턴 불빛이 깜빡이도록 버튼을 한 번 더 누르고 머리를 형이 오는 방향으로 고정한다. 그리곤 버릇처럼 생각한다.
'아, 그냥 갈까?'
어둠 속 랜턴 불빛이 반짝인다. 안도하는 히맨에게 분명 긴 시간이 아닌 짧은 기다림이 길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어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간격이 너무 벌어지거나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알려줘요."
다행히 이제 길은 평탄하다. 생각보다 밝은 느낌에 랜턴을 꺼버린다. 그때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달빛 그림자다! 달빛 하이킹이라니!'
커다랗고 동그란 따뜻한 빛이 둘의 뒤를 비추고 있었다. 달빛, 칠흑 같은 어둠 속 둘의 뒤를 받쳐주는 유일한 빛이었다. 기분이 좋아진다. 감성적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앞의 언덕 위로 붉은빛이 올라온다. 그 빛과 함께 풍력 발전기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수 백개로 늘어난다.
'휴, 별일 없이 야간 운행을 마쳐 다행이야.'
'시원해서 걸을만하네!'
상황 속에 있을 때는 순간순간이 괴롭지만, 언제나 그렇듯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듯. 그리고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기곤 하지. 그래도 이 해가 지고 또다시 이어질 야간 운행은 이전보다 조금 더 낫지 않을까?
길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니 이제는 발목을 통해 쌓여가는 모래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히맨의 구멍 난 양말을 대체할 것은 발목이 없는 양말뿐이었다.
'양말 사야겠다.'
7.7km 갈림길 이정표가 나왔다. 화이트워터 이정표를 지나자마자 시원하게 흐르는 물이 보인다.
"와우~ 워~! 대박!"
“어제 쉬고 밤에 그냥 이리로 올걸 그랬다.”
화이트워터의 방문객 센터 옆 PCT 하이커를 위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PCT 하이커 웰컴"
방문자 센터에 들어가 습관처럼 방명록에 흔적을 남기고 건물 안을 둘러본다. 의무적 의식 같은 두리번 거림 후에 센터를 나와 텐트 칠 곳을 찾는다.
"09시 25분, 여기서 해가 기울 때까지 휴식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물에 발도 좀 담그고요...... 여긴 완전 제대로 된 휴양지네요."
나무 그늘 아래 플라이 없이 이너 텐트만 설치한 후 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스킨 슈즈를 신고 고프로에 방수 하우징을 입혀 준 후 사이트 옆으로 위치한 연못부터 훑어본다. 연못의 많은 물고기들을 지나, 마치 노천탕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곳으로 향한다. 하지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 옆 나무 그늘 아래의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간다. 벌써 자리를 잡아 앉은 형이 물이 차다고 알린다. 히맨은 발을 먼저 담근다.
"으~ 차거!"
흐르는 차가운 물에 다리를 쭉 펴고 앉는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일어나더니 쭈그려 앉아 세수를 한다. 역시나 잊지 않고 촬영한 고프로 셀카 영상 속 히맨은 웃고 있다.
"10시 10분입니다."
"텐트 안에 누웠습니다. 얼마만의 낮잠인지."
"오랜만에 제 공간 보여드릴까요?"
누워서 고프로로 모기장 같은 텐트의 천장을 훑는다.
"14시 45분입니다."
"시원한 물에 잠깐 물을 담그고 왔는데, 같이 여행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그랬으면 좀 달랐을까? 좀 달랐을 거 같은데...... 모르겠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영상으로 남기는 히맨의 텐트 안은 새소리로 가득하다. 드러누워 눈을 감는다.
낮잠을 자다 일어나 또띠아와 시리얼을 간식으로 먹는다. 그리고 다시 눕는 히맨. 문득 이 여유로움이 낯설다.
'이렇게 편해도 되는 건가?'
16시 30분입니다.
계속해서 쉬고 있고요. 18시쯤에 야간으로 운행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새벽 내내 운행을 하게 되더라도 적어도 20, 최대 30km 이상 운행을 한 후에 머물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머물 예정이고요.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야간에만 움직이는 것으로, 대략 18시쯤 출발해서 7~8시간 혹은 그 이상 새벽까지 운행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을 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빅 베어 시티에는 월요일 새벽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은 걱정이 됩니다만...... 이렇게 쉬고 있는데 뭔가 약간은 이렇게 쉬어도 되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조금 있기도 하고, 뭐 그렇게 막 경쟁을 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것들 최대한 경험을 하면서 PCT를 걷기로 했기 때문에, 계획대로 하되 최대한 너무 무리를 하지 않는 선에서 PCT 최종 목표는 완주지만 최대한 6개월 내에서 완주할 수 있는 것으로 무리하지 않고 무사히 잘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초반이니까요. 어쨌든 3~40분 뒤에 밥을 먹고 나갈 준비를 해보겠습니다.
- PCT DAY#16 20150501_16:30 중간보고 中
20150501#16-1_ZiggyBear-Whitewater Preserve
by 히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