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여전히 밝다.
우리 뒤에 무엇이 놓여 있든
그리고 우리 앞에 무엇이 놓여 있든,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품고 있는가와 비교하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What lies before us and what lies behind us
is a tiny matter compared to what lies within us.)
- Ralph Waldo Emerson -
뜨거운 오후를 화이트워터에서 보내며 주변을 둘러보다 발견한 한 바위에 새겨진 캐나다까지의 거리는 2445.4마일, 약 3945km다. 멕시코 국경에서 이곳까지의 거리가 219.1마일이라고 하니 지금까지 그만큼 걸었다는 말인데...... 캐나다까지 걸어야 할 길은 도저히 그 끝을 가늠할 수가 없다. 까마득하다. 그래서 아무런 의미 없는 숫자처럼 느껴진다. 잡히지 않는 허공 속 꿈만 같다. 아마 히맨 또한 그럴 것이다.
어느 숫자가 저기 적혀있어야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어느 숫자가 저기 적혀있어야 꿈이 아닌 현실처럼 느껴질까?
저 숫자에 의미를 두지 않고 하루하루를 걸어나가는 지금이 나은 걸까?
저 숫자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계산하고 치열하게 달리듯 재촉하는 그때가 오면,
히맨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받아들일까?
가보면 알겠지.
일단 가보자.
화이트워터의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다시 배낭을 꾸려 둘러멜 시간이다.
"18시 03분 2차 운행, 야간 운행 시작합니다. 30km 갑니다. 일단 가보겠습니다."
히맨이 길을 나서자마자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저 걸으려고 나갔다가 그냥 해가 질 때까지 머물기로 했다.
나가려고 한 곳에서 나는 머물고 있었다.
(I only went out for a walk and finally concluded to stay out till sundown, for going out, I found, was really going in.)
- John Muir -
화이트워터를 벗어나며 잠시 멈춰 고프로를 들이댄 이유는 돌에 새겨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기보다는 적잖이 들어왔던 '존 뮤어'라는 친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길과 함께 있는 예쁜 그림을 찍고 싶은 마음이었겠지.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길 위에 하이커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서 있다.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다.
“와 이거 방울뱀 아니야?”
아저씨는 스틱으로 방울뱀을 몰고 있었다. 꼬리에서 들려오는 방울소리의 주기는 그 어느 때보다 짧고 큰 진폭으로 들려오며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며 경고를 하는 듯하다. 히맨은 잠시 고프로를 들이대며 계속해서 뱀을 트레일 밖으로 몰아내는 아저씨를 담더니 이내 갈 길을 이어나간다.
길은 계곡으로 진입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돌과 바위만이 가득하다. 맞게 가고 있는 거 같은데 길이 점점 험해진다.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위치를 살펴보니, PCT를 벗어난 지 한참이 지난 상태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많이 가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두 사람이 경쟁적으로 멈추지 않고 속도를 내다보니 앞에 있던 히맨은 잠시 멈춰 길을 살펴볼 여유 없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바빴다.
"이쪽으로 가면 될 거예요"
히맨은 무작정 스마트폰만을 쳐다보며 PCT로 가는 직선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형이 뒤이어 따라간다.
'헐! 이거 어쩌지?'
눈 앞으로 커다란 벽에 가까운 산이 가로막고 있다. 애플리케이션은 PCT 길이 바로 20~30미터 앞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PCT는 그 산을 넘어 건너편에 있는 듯하다.
'모래가 미끄러워서 좀 위험하겠는데?'
히맨은 순간 고민한다. 스스로 운행을 책임지며 앞서 길을 찾아 걷는데 이런 상황이 생겨 참 난감하다.
'아~ 그렇다고 돌아가면 2~3km를 더 걸어야 할 텐데......'
결국 히맨은 그 미끄러운 경사에 발을 내딛는다.
"형 이것만 넘으면 PCT예요. 미끄러우니까 조심히 올라와요."
발이 미끄러지며 비틀댄다. 스틱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올라서니 가시 달린 덤불들로 뒤덮여 있다. 길은 물론 없다. 그냥 헤쳐나가는 수밖에. 일단 멈추고 형이 잘 올라오는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본다.
"엇, 조심해요!"
형이 미끄러지며 넘어진다.
'아......'
"19시 11분입니다."
이 상황 또한 놓치고 싶지 않은 히맨은 어느새 고프로를 들고 형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 미안해요. 길을 잘못 들어가지고. 길은 보여 근데 애들 저 밑으로 지나가더라고. 길은 저거야."
형이 올라온 후 다시 아래로 보이는 길을 찾아 가시나무들을 헤치며 내려간다. 히맨은 가시에 찔릴 때마다 움찔대며 길을 향해 내려간다. 긴 바지를 입었는데도 이 정도라면 형의 다리는 상처투성이가 될게 뻔했다. 피부도 완전히 그을려서 안 그래도 따가울 텐데......
그렇게 둘은 힘겹게 다시 트레일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무릎 괜찮아요?"
이미 살갗이 까져 피가 난 형의 무릎을 보며 묻는다.
"괜찮아"
"일단 물로 좀 씻어내고, 밴드 붙여요"
히맨이 배낭을 내리고 짐을 푼다. 비상약품 등은 히맨이 가지고 있다. 습윤밴드를 크기에 맞게 잘라낸 히맨은, 자신의 물통을 꺼내 든다.
"일단 이걸로 좀 씻어내고......"
물통을 기울여 무릎에 물을 붓는다.
"물이 빨간데? 이거 이온음료 먹던 거 아니야?"
"아, 그렇긴 한데 완전 조금 탄 거라 묽어서 괜찮아요"
그렇게 불그스름한 물로 붉은 피와 모래먼지를 씻어낸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내가 길을 제대로 못 찾아서 이렇게 됐네요."
한국에서 출국할 때 창빈이 형이 챙겨준 습윤 밴드를 붙여주고 일어나며 말한다. 히맨은 미안했다. 그리고 앞장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속상하다. 뒤에서 밀어주는 일과 앞에서 누군가의 이끄는 일은 분명히 다르다. 항상 뒤에만 있던 히맨은 아무도 앞에 없는 이 자리가 아직도 많이 어색하다.
"앞으로는 이렇게 길 잃으면 일단 뒤로 되돌아가기로 해요"
걸은 지 한 시간이 되자 다시 걷기를 멈춘다. 조금이라도 더 쉬겠다는 생각인지 배낭을 풀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바로 풀썩 주저앉는 히맨. 해는 졌지만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
달은 여전히 밝다.
고프로의 야간 촬영을 시험하듯 이것저것 만져보며 찍어본다. 일어나기 귀찮은 듯 배낭에 기대 누운 채. 생각보다 밝게 나오는 사진이 신기하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야간 운행 중인 이 순간을 담고 싶은 히맨.
"20시 52분입니다."
"야간 운행 중이고요 보이실지 모르겠는데 달빛이 엄청나게 밝습니다. 저희 지금 헤드랜턴도 없이 야간 운행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달빛이 밝은 상황입니다. 아이고 화면이 안 보이네. 도시가 보이는데 야경이 엄청나게 멋있습니다. 동영상도 야간모드가 됐으면 좋겠네요. 앞으로 10~15 정도 더 당길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최대 추울 것으로 예상했는데 의외로 대체로 선선하고 운행하기 딱 좋은 날씨입니다. 재킷을 따로 입을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긴 팔티 하나로 충분히 운행이 가능한 정도의 기온입니다. 그러면 무사히 도착해서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길을 걷다 멀리 보이는 한 마을의 불빛이 보인다. 달빛 아래 환상적인 야경을 바라보며 감탄하며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사진이 나오지 않아 아쉬운 히맨.
"00시 03분입니다."
"5월 1일 2차 야간 운행 18km 정도 운행을 종료합니다. 계곡 옆에 자리를 잡고 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2차에 걸쳐 감행한 야간 운행을 무사히 마쳤다. 첫 야간 운행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1차 운행은 길이 험했고 서로 호흡이 맞지 않았고, 2차 운행은 길을 잘못 들어 고생했다. 그러고 보니 형의 무릎도 그렇고 두 사람의 컨디션을 보면 그리 무사한 것도 아닌 것 같다.
"형 오른 발목은 어때요?"
형은 접질린 오른 발목도 좋지 않다했다. 멘소래담을 일단 바르라며 건네주는 히맨. 두 번에 걸친 PCT 첫 야간 운행은 히맨에게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밥을 먹은 후 바로 타이레놀을 하나 챙겨 먹는 히맨의 표정에서 내일 운행에 대한 부담감이 느껴진다. 히맨은 떠오른 감정들이 정리되지 않는지 혹은 너무 피곤한 탓인지 횡설수설하다가 영상기록을 마무리한다.
손발을 씻고 들어와 있는 상태인데요.
2차에 걸쳐서 총 대략 29~30km 운행을 완료했습니다. 처음이라 그런지 나름 환경이 좋기는 했습니다만, 달빛도 밝고 헤드랜턴도 따로 필요 없는 상황이기는 했는데 그래도 역시 길을 찾기 힘들고, 체력적인 부담이나 아직 시간에 대한 적응이 안되어 있다 보니까 졸린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로 조금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속도도 늦었고... 내일도 비슷하게 운행을 해볼 생각인데, 일단 오전 운행은 없고요.....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질지 조금 더 기대를 해보겠습니다.
초반에 제가 길을 좀 잘못 들어가지고 높은 언덕을, 트레일 길이 아닌 높은 언덕을 한 번에 치고 올라가야 되는 상황이 있었는데요, 그 과정에서 희종이 형이 좀 미끄러져서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 쪽에 찰과상을 입었는데, 되게 좀 미안하고, 언제나 항상 뒤쪽에서 서포트하는 역할만 하다가 앞쪽에 길도 찾아야 하고 내주고 하는 것들이 아직은 많이 서툰 것 같습니다. 좀 더 노력을 해야 될 부분인 것 같고요. 야간이다 보니 조금 감성적이라고 해야 될까요. 아니 감정적? 눈에 보이는 것들이 그리 많지 않다 보니까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또...... 엄청 많이 화가 치밀었습니다.
나보고 처음 마음이랑 변했다고 했는데, 그 원인이 자기한테 있다고는 생각을 안 하는지 그 생각을 하면서 너무 열이 받아서 분노의 스틱질(?)을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챙기면서 나는 왜 그리고 되게 소심하게도......
남자의 자존심을 엄청나게 긁는, 무시하는? 그때 그 일이 떠올라서......
그 생각도 했어요.
기내식 먹고 싶더라고요.
저는 참 평범하진 않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기내식 빵 엄청 먹고 싶어~
암튼 오늘 이만하고 자겠습니다.
손으로 쓰는 일기까지는 못 쓰겠어요.
- 영상 다이어리#16 中
부상 및 처치
양희종 : 오른 발목 접질림 (멘소래담)/양쪽 무릎 찰과상 (메디폼 처치), 김희남 : 타이레놀 복용
기타 특이사항
처음 야간 운행을 진행하다 보니 아직은 몸이 적응을 못 하는 듯, 양희종 대원은 2차 운행 중반부터 졸음 호소. 전체적으로 몸이 피로함. 양말 교체(발목양말이라 모래유입과 찔림에 취약)
- PCT#16 운행기록 中
20150501#16-2_Whitewater Preserve-WRCS0230(Campsite near Mission Creek)
by 히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