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걷지 말아야 할 길을 걷는 듯한
"종종 달리기는 개뿔......"
피로가 풀리지 않아서 인지 도무지 속도를 내질 못하고 있다.
어제 정말 오버페이스 하긴 했는지, 걷는 모습이 무기력 그 자체.
히맨은 종종 달리는 것도 괜찮겠다는 어제의 말을 취소한다.
"선선한 걸 넘어서 추위를 느끼고 있습니다.
컨디션이 좋은 편이 아니라 걱정이 됩니다.
파라다이스 카페로 가서 휴식을 좀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침부터 무언가 시원찮더라니......
아침을 먹고 조금 남긴 우유에 커피를 마셔보려고 데우던 물을 통째로 엎어버렸다.
귀한 생명수를 300ml나!!
하여간 아직도 참 서툴다.
그래도 출발하자마자 3~4km만에 나타난 PCT하이커를 위해 정성스럽게 만들어놓은 급수대는 히맨을 안심시킨다. 매년 물의 수요를 예측하기 위해 방명록에 받은 물의 양을 적어놓도록 되어 있다. 세심한 트레일 엔젤들이다. 그런 방명록이 신기해 글을 남기고 고프로를 들이댄다. 미국이라고 만 나이 28을 적은 히맨.
크게 변화 없는 길을 한참 걷고 있던 히맨의 옆구리가 붉게 물들었다.
'아오~!'
그동안 말썽 없던 수낭 캡이 빠져버려 호스에서 물이 펑펑 솟는다. 파워에이드 원액을 탄 붉은빛의 물. 마치 붉은 혈액이 혈관을 타고 펑펑 솟는 것만 같다.
또 귀한, 피 같은 생명수가......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일어난다더니......
드디어 도로가 나타난다. 18km 지점, 파라다이스 카페로 향하는 도로.
이정표 아래에는 친절하게도 카페 운영시간과 차량 픽업 관련 안내가 붙어 있다.
그 아래로 놓인 과일과 음료수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런 걸 트레일 매직이라고 하던가.
음료수를 들이키고, 오렌지를 하나 챙긴다.
몇몇 하이커들이 도로 옆에 앉아 셔틀을 기다리고 있다.
둘도 셔틀을 탈까 했지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확신할 수 없어 걷기로 한다.
도로를 따라 카페까지 걷기 시작한다. PCT가 아닌 길 도로 1.5km. 지금까지 걸은 거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상당히 귀찮고 힘들어 보인다. 아마도 걷지 말아야 할 길을 걷는 듯한 모습.
멀리서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빨간색 간판.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다.
파라다이스 밸리 카페!
시끌벅적한, 하이커 반 일반인(?) 반인 식당의 분위기는 밝다. 야외 좌석들이 놓인 공간의 난간에 줄지어 기대져 있는 배낭들, 그 끝에 배낭을 내려놓는다. 구석의 빈자리를 찾았고 테이블 사이를 지나며 눈이 마주친 하이커들과 가볍게 인사를 한다. 얼마 전에 만난 이글아이도 함께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살펴본다.
메뉴판의 수많은 종류의 햄버거 중 고민을 하다가 '더 거스 버거'를 시킨다. 뭘 알고나 시키는 건지......
아마도 그냥 비싼 거라 시켰을 거다. 맛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먼저 나온 맥주를 음미하며 햄버거를 기다리던 중 뒤에 놓여있던 먹을 것 가득한 하이커 박스를 발견한다.
'이걸 한 번 시도해볼까?'
나름 먹을 만했거나 맛있어 보이는 식량 봉지들을 낚시하듯 집어 올린다. 무엇보다 누텔라를 발견한 히맨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와~ 대박!"
접시 한가득 담긴 햄버거와 후렌치 프라이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이런 건 찍어야 해!'
바로 손을 대고 싶은 것을 잠시 억누르며 고프로를 먼저 접시에 들이댄다. 햄버거 냄새가 참을 수 없을 만큼 향긋하다. 식빵 같은 모양의 노릇하게 구워진 빵은 맛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제 먹어볼까?'
손으로 잡고 먹기에는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쓴다. 정신없이 잘라 입에 넣는다. 입에 한가득 넣고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이곳은 파라다이스가 분명하다. 지금까지 저만큼 만족스러운 미소를 본 적이 없다. 저리도 행복할까. 양이 상당히 많다고 말하면서도 손과 입은 정신없이 움직인다. 결국 텅 빈 접시.
'아~ 좋았다!'
'이제 좀 힘이 나는 거 같은데?'
카페에서 잠깐의 휴식 후 카페의 차량을 타고 PCT로 돌아간다. 힘을 내며 길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화재로 인해 트레일이 통제되어 있다는 안내판을 마주한다.
'화재로 인해 10마일 뒤인 '시다 스프링스' 갈림길부터 트레일 폐쇄'
이제야 카페에서 다른 하이커들이 하던 이야기들이,
대부분의 하이커들이 아이딜와일드까지 차량으로 바로 이동한다는 이야기가 이해가 간다.
"일단 거기까지 가보죠"
처음 맞닥뜨린 상황에 살짝 당황한 듯하지만,
차량으로 점프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려던 히맨이다.
얼마 남지 않은 오후 운행을 이어나간다.
형은 산악 잡지사에서 연재를 요청해 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너 할래?”
히맨은 거절한다. 이미 기록만으로도 바쁜데, 무언가 더 더해지는 것이 부담인 듯.
“그럼 내가 할게”라고 한 형은,
운행이나 재보급 정보보다는 개인적인 다이어리뿐이라며 걱정하는 듯하다.
연재 마감에 쫓기며 글을 쓰느라 PCT를 온전히 느끼지 못할 것이다. 또한 형의 목표인 '스스로 그러한, 신선이 되겠다'는 목적을 이루기도 쉽지 않겠지.
예정보다 8km 정도 단축된 23km의 운행을 마친다.
"길을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내일이 아니고 내일모레 3차 보급지인 아이딜와일드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화장실이 급해서 조금 이따 뵙겠습니다."
어쩐지 막판에 좀 급해 보이더라니...... 운행 종료 보고가 끝나자마자 급히 수풀로 달려 나간다. 히맨의 기록에 의하면 PCT를 시작하고 5일 만에 한 번 아니 두 번, 다시 4일 만에 두 번이었는데, 이번에는 이틀 만에 배에 신호가 온다. 앞으로 이틀에 한 번 정도로 맞춰지지 않을까 싶다.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후 텐트를 치기 시작한다.
오늘 사이트는 정말 완벽해 보인다. 나무 아래 히맨만을 위한 보금자리. 텐트를 둘러싼 나무들이 안전하게 지켜줄 것만 같다.
사진 한 방 찰칵.
'이런 집에서 살아도 괜찮을 거 같아'
'아, 여기에 물만 있다면 말이야!'
오늘 저녁은 라면이다. 언제나 그렇듯 밥할 때 가장 설레는 히맨.
"노을 완전 예뻐"
나와 보라는 형의 말에 라면이 담긴 코펠을 들고 나온다. 고프로도 함께.
그 예쁜 노을 앞에서도 바삐 수저질을 해대는 걸 보니 노을보다는 라면이 우선인 듯.
"해지니까 바로 추운데?"
형이 자기 집으로 들어간다. 이제 잘 시간 아니 각자 혼자만의 시간의 시작.
텐트 안에 엎드린 히맨은 하이테크 펜과 다이어리를 꺼낸다. 과연 언제까지 빼먹지 않고 저렇게 꾸준히 적을 수 있을까?
오늘 다이어리의 마지막 두 줄은 이러하다.
- 좋은 사이트에 자리 잡은 텐트 안에 엎드려서…
참, 고생했어!!^^
WRCS140B(Nance Canyon) to CS0157
by 히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