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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 잘 보이지 않아요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하지만 아직 까마득 하기만 한

by 히맨
"앞이 잘 보이지 않아요"


트레일은 안개로 자욱하다.

어느덧 10일 차. 쌀쌀함에 재킷을 입은 채 빠른 속도로 걷고 있다. 이내 몸은 열을 내며 뜨거워지고, 추운 듯했던 날씨는 걷기 좋은 시원한 날씨로 다가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행 초반 200km를 돌파하며, 고프로 영상을 찍는 히맨.


"지금 온 거리의 약 스무 배 정도만 더 가면 됩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하지만 아직 까마득 하기만 한 PCT의 끝.

말 뒤에 가려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 위를 하염없이 걷고 있는 진짜 히맨의 기분 혹은 감정은 무엇일까?

안개가 조금씩 걷힌다.


갑자기 달리기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뭐가 그리 급한 건지.

선선한 날씨 탓인지 잦은 소변을 보기는 했으나, 이런 산길에서 화장실이 급해 뛸 일은 없고,

급수지도 그냥 지나치는 걸 보면 물이 급하지도 않아 보인다.

표정을 봐서는 신나 있는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형을 따돌리려고 마음을 먹은 것 같기도 하다.

길 바로 옆에 쭈그려 앉아 대충 에너지 바를 하나 꺼내 먹으며 짧게 휴식시간을 가지는 걸 보면.


비교적 이른 오후에 목적지에 도착한 히맨.


"형 오기 전에 텐트를 치고 여유롭게 쉬고 있겠습니다.

마지막 9~10km 정도를 한 시간 50분 만에 주파하면서......

러닝 데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거의 종일 뛰었는데요,

가끔씩 이렇게 뛰는 게 저는 더 편한 것 같습니다."


"상으로 프로틴 바 하나 먹어야겠네요"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또 허기가 찾아왔는지 밥을 짓는다.

밥을 지으며 열어놓은 텐트 문을 통해 걸어온 길을 계속해서 응시한다.

'왜 안 오지?'

어느새 밥까지 다 먹었는데, 형은 나타나지 않는다. 여유로우면서도 불안한 그런 기분.

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할 때쯤 형이 나타난다.

중간에 물을 받고 오느라 늦었단다.

오늘도 무사히 한 자리에 텐트를 친다.


흐리던 날씨는 이내 텐트 위로 비를 뿌려댄다.

따갑게 텐트를 때리는 소리로 가득한 텐트 안.

오늘따라 빗소리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문득 노래가 생각 나는 듯 흥얼.


또 비가 와요~
널 보고 싶게
잊을만하면
또 비가 와요
비를 맞아요, 너를 맞아요
너 가고 없는 이곳에 비가 내려요
- 이현우 - 비가 와요 中.


아직도 한 낮처럼 밝은, 캘리포니아의 해는 참 길기도 하다.


'뭐 할 거 없나?'


아이패드로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며 브이를 들어 보이는 히맨.

출국 전날 급하게 생각난, 보지 못 한 영화들 중 하나.

계속해서 회자되는 명대사들 때문에 봐야지 생각만 하고 보기를 미뤄오던 영화였다.

그렇게 아주 여유로운 히맨의 10일 차 밤이 깊어간다.


Lost Valley Spring Trail to WRCS140B(Nance Canyon)

by 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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