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맨 이즈 인 제주_Day#6_20170430
시끌벅적할 것으로 예상했던 아침은 고요했다. 주방으로 나가보니 이미 다 떠난 듯 아무도 없었다. 토스트를 먹고서 다시 방으로 돌아가 보니 나와 한 방을 쓰던 그도 이미 떠나고 없었다. 다시 주방에 나와 쓰레기를 버리는데 쓰레기통에는 그가 조금 전 버리고 간 쓰레기가 버려져 있었다. 그제야 어젯밤 그의 안주 또한 나와 같았다는 걸 알아챘다.
동백길을 걸어야 하는 오늘은 버스를 타기로 한다. 도로를 걷는 걸 찍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았고, 시간도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미 찍은 도로를 왕복으로 두 번이나 찍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대중교통을 탔다. 제주 버스 앱을 사용했는데 생각보다 편리했다.
중문에서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했다. 배차시간은 길었고, 근처에서 쉬다가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기로 한다. 산으로 들어가기 전 뭐라도 좀 먹고 가야겠다며 돌아다니다가 한 카페에 들어갔다. B.E.L.T.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켰다. 조금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던 샌드위치는 기대 이상이었다. 11시 15분 버스를 탈까 하다가 조금 더 여유를 만끽하고 싶어 졌다. 한 시간의 여유가 생긴 나는 노트북을 꺼내 글을 썼다. 마치 여행작가가 된 느낌이었다.
“기사님 그냥 서귀포 자연휴양림에서 내릴 수 있을까요?”
원래 목적지인 법정사 입구로 향하던 중 지도를 살펴보던 나는 그냥 한 군데 더 돌아보기로 했다. 버스는 서귀포 자연 휴양림 앞에 멈춰 섰다. 셋째 날 밤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자기는커녕 둘러보지도 못한 그곳에 다시 돌아왔다. 커다란 휴양림을 한 바퀴 돌면서 잘 정돈된 수많은 데크와 오름 전망대 그리고 물놀이 시설들을 볼 수 있었다. 오늘 하루는 뭔가 전체적으로 상쾌한 느낌이다.
버스 시간이 맞으면 버스를 타고 내려갈까 했으나 배차간격이 긴 버스는 한참 뒤에나 올 것 같아 그냥 도로를 따라 내려가기로 한다. 2.5킬로미터 정도니 내게는 아주 부담이 되는 거리는 아니었다. 무오법정사로 들어서는 도로에 접어들어 얼마나 들어갔을까. 오른쪽의 공터에 커다란 데크 시설들이 눈에 띄었다. 버려진 장소이거나. 새로운 캠핑장을 지으려는 것 같았다. ‘이런 곳이 있는 줄 알았으면 저번에 밤에 고생하며 내려갈 일이 없었을 텐데...’ 다음에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위치를 기록해둔다. 그리고 드디어 한라산 둘레길 동백길 구간에 접어들었다.
동백길은 이전에 걸은 천아숲길과 돌오름 길보다 좋았다. 모든 길을 담겠다며 애쓰며 걷고 있다. 날짜가 제대로 설정되어 있는지 확인하면서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된다. 그때마다 앱과 연결하는 일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고프로가 잘 찍고 있는지 수시로 빨간 불이 깜빡이는 지 확인하고, 배터리가 다 되면 발길을 멈추고 교체해준다. 오르막에서는 카메라의 각도를 높여주고 내리막에서는 살짝 내려준다. 여기에 중간중간 랜드마크나 안내판 그리고 특이사항 등을 영상이나 사진으로 기록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작 그 속에 나는 없구나.’
그러다가도 또 이 시절의 이 길을 담는 일은 어쩌면 위대한 기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10년 20년 뒤에 사람들은 나의 기록을 보고 지금 ‘이 시절의 길은 이랬구나’하겠지? 아주 최첨단은 아지만 그래도 나름 최신의 기록방법을 이용해서 최선을 다해 담고 있으니 분명 의미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한다.
사람들이 보고 싶은 건 뭘까?
사람들은 길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할까,
아니면 그 길을 걷는 나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할까?
아니 난 왜 내가 보고 싶은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보고 싶은 걸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보고 싶은 건 그 길 위에서의 나의 모습에 가까운 것 같다.
동백길을 마치고 계단으로 길게 이어진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간다. 옆으로 보이는 탁 트인 전망의 언덕은 정말 매력 있었다. ‘여기서 자고 내일 바로 올라가면 좋긴 하겠다.’ 여기에 텐트를 칠까 했지만 지금 밥을 할 물이 없다는 게 참 아쉬웠다. 100~200미터 정도를 내려오니 도로로 이어지는 돈내코 탐방안내소가 나온다. 바로 옆에 수도시설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물을 받아서 다시 올라갈까?’
그래도 야영장이 따로 있는데 굳이 불법을 저지르며 산에 머물 이유는 없을 것 같다는 결론에 마실 물만 조금 받아 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간다.
‘뭐 이렇게 머냐...’
길은 공동묘지로 이어졌는데, 아직도 돈내코 야영장까지는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했다. ‘공동묘지 옆에서 자면 귀신 나올라나?’ 생각도 잠시 하면서 어둑어둑해진 길을 걸어갔다. 도로 운행이 길어지자 지루함에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 승희가 들어왔다. 국토순례할 때가 생각난다고 했다. 내가 몸담았던 태권도 동아리에서는 매년 여름 방학 때마다 국토순례를 했다. 승희는 누구는 울고 누구는 짜증을 내고 아프고 했었다는 추억을 끄집어내어 주었다. 그런데 그게 벌써 10년 가까이 된 일이라니... 알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화장실 샤워실 수도시설 등 예상했던 것보다 잘 갖추어진 돈내코 야영장의 모습에 여기까지 내려오길 잘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들이 떠들어대는 모습의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이미 자리 잡은 꽤 많은 텐트들 사이에서 내가 텐트를 칠 데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잔디밭도 충분히 훌륭했다. 나는 한 가로등 아래 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텐트 안에서 이런저런 작업 중인데 주변의 개들이 싸우는 건지 노는 건지 계속 낑낑댔다. 내일은 다시 예비일이다. 말짜하우스에 함께 갔던 앨리가 픽업 오기로 했고 쨍쨍 님도 만나 함께 사려니 숲길을 걷기로 했다. 내일은 부담이 없어 빈둥빈둥 늦은 시간까지 여유롭게 글을 쓰고 영상도 본다. 참, 내일 보기로 한 앨리가 별 사진을 찍어 보여 달라고 했다. 오늘 하늘도 별이 참 많다.
히맨 이즈 인 제주_Day#6_20170430
가온누리 게스트하우스 - 서귀포 자연휴양림 - 동백길 - 돈내코 야영장
20170430_22:47@럭셔리한 돈내코 야영장
by 히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