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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제 길

오, 나의 네팔!

하나. 기어이 가는구나

by hearida

(2012년 4월 네팔 여행 당시 쓴 일기를 바탕으로 쓴 글이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기어이 가는구나.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낯선 내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엔 거들떠도 안 보던 등산용 고어텍스 잠바에 청바지, 트래킹화를 신은 내 모습은 아무리 봐도 웃기기만 했다. 맙소사, 이게 무슨 꼴인가. 게다가 등에 는 아담한 내 키와 키재기를 할 만큼 거대한 가방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내 몸에 걸친 이 모든 것들을 훌흘 벗어던지고 싶었다. 나는 그저 이 좋은 4월의 봄 햇살 아래, 아끼는 베이지색 힐을 신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아메리카노나 한 잔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 기어이 가는구나.

네팔이라니. 생각도 못했다. 물론, 네팔이라는 나라의 존재 정도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뭘 먹는지, 뭘 하며 사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선택 과목으로 사회문화를 들은 나는 세계 지리에 약하다. 그러니 나의 무지 혹은 무식은 모두 국가의 교육 정책 탓이라 생각해주길!) 가끔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프로에 나올 때마다, '뭐, 인도랑 비슷한 분위기네' 정도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도 여행지로 꿈꿔본 적은 없었다. 여행은커녕 우연히라도 가게 될 거라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이렇게 말하면, 네팔 트래킹이 평생의 꿈이었던 우리 엄마를 비롯하여 네팔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당장이라도 달려와 나에게 따지고 들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네팔을 싫어한다거나 네팔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내가 네팔을 내 살아생전 방문 예정지에 올려놓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나의 본성과 취향의 문제였다. 나의 네팔 여행을 전해 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인 강여사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이라며 소리 질렀다. 지난 반평생 그녀를 봐왔지만, 그런 돌고래 소리는 처음 듣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하얀 강여사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허옇게 질려있었다. 그만큼 네팔과 나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란 뜻이다. 움직이기 싫어하고, 걷기 귀찮아하고, 운동 신경 없고, 등산 질색하고, 음식 가리고, 입 짧고, 잠 귀 밝고, 벌레라면 질색하고, 자연친화적인 삶에도 별 감흥이 없는, 정말 체력까지 저질인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나에게 여행이란, 자고로 현지의 그림 같은 카페에 앉아 커피와 케이크를 시켜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지켜보는 것. 내 말은, 그야말로 나와 네팔 사이에 어떤 접점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기어이 간다, 나 헤아리다가.

네팔, 그 멀고도 높은 안나푸르나에 오르러.

맙소사!


가족이 뭐길래.


자아탄력성이라는 게 있다. 힘든 일을 겪었을 때 그 자아가 회복되는 능력을 말한다. 나는 이 자아탄력성이 매우 좋다. 무슨 뜻이냐면, 실연이나 사회생활의 스트레스 등을 이유로 느닷없이 일상을 벗어나 안나푸르나에 오르겠다 결심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말이다. 힘들면 술 한 번 마시고, 펑펑 울고, 푹 자고, 그러면 끝이다. 가뜩이나 힘든데 그 높은 산까지 올라 일부러 나의 비루한 몸뚱이를 혹사시킬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의 네팔행의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그러니까 이게 다 가족, 가족 때문이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이여사로 말할 것 같으면, 원하고 바라는 것은 반드시 이루는 성격이다. 우리 집 가훈을 '연습과 노력'이라 지을 정도니, 엄마의 목표를 향한 집념과 끈기는 말로 하면 입이 아플 정도이다. 그런 엄마의 꿈은 세계 여행! 그리고 앞서 말했듯, 네팔 트래킹은 아이슬란드 오로라와 함께 엄마의 오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거듭 말하지만 국가 교육 정책의 실패로 네팔에 대해 전혀 무지했던 나는, 네팔 트래킹 하면 광활한 몽골의 초원을 떠올리곤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속으로 '그 황량한 초원보다는 한강 고수부지가 걷기에 더 좋을 텐데'라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생각도 종종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친동생처럼 아끼는 선영이가 네팔 여행을 떠나겠다고 말을 꺼냈다. 해외여행이 처음인 선영이에게, 나는 우리 엄마도 네팔에 관심이 많으니 도움이 될 거라며 엄마를 소개하여줬다. 이게 화근이었다. 일이 전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도 네팔 여행을 결심한 것이다. 사실 뭐, 여기까지는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그렇게 오래 바라던 일이었으니, 선영이를 보고 엄마가 자극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엄마, 아빠, 선영이, 이렇게 세 명이라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3이라는 숫자는 뭘 해도 애매하게 짝이 안 맞는 숫자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에게 여행을 권했다. 기가 막힌 이유였으나, 경치가 좋다거나 새로운 경험이라는 이유보다 훨씬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기똥찬 이유이기도 했다. 꼭 같이 갔으면 좋겠다며 목을 매는 삼인조에게 나는 몇 날 며칠을 시달리고 또 시달렸다. 그래도 나는 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며 단호히 거절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네팔 트래킹은, 알고 보니, 한마디로, 등산이었다. 안나푸르나 그 설산을 몇 날 며칠씩 걷고 또 걷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고서 어찌 선뜻 가겠다 할 수 있겠냔 말이다. 그 고생길을! 심지어 내 돈을 내고 해야 하다니. 나는 완벽한 도시 친화형 인간이다. 내 두발로 해발 200m만 올라도 호흡 곤란이 오는 여자가 해발 3,000m도 넘는 곳에 오르면 죽을지 모른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고, 고래는 바다에서 헤엄을 쳐야 하고, 나는 평지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세 사람은 집요했다. 도저히 지켜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수많은 공약과 약속이 선거철 후보들보다 남발되었다. 거기에 사이비 종교 교주에 빙의된 엄마는, 안나푸르나에 오르면 살이 쪽 빠지고 근육도 붙고 피부도 좋아져 연예인을 데뷔할 만큼의 미모를 얻을 수 있을 거라며 나를 세뇌했다. 지금 생각하면 전지현이 사실은 환갑이라는 말보다 더 어이없는 거짓말이지만, 당시의 나는 귀가 솔깃했다.

결국 나는 버틴지 채 3주가 안되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렇게 원한다면 가드려야지 어쩌겠는가. 눈치를 봐서 안나푸르나에는 세 사람만 보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산 아래 숙소 침대에 누워 책이나 실컷 읽다 오겠다는 이룰 수 없는 꿈을 마음 한 구석에 숨겨둔 채, 나는 기뻐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Kathmandu, Nepal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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