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드디어, 출발!
여행.
설렘.
앞으로의 여정에서 나는 무엇을 보게 되고 또 어떤 일들을 겪게 될까?
내가 마주하게 될 사람들은 누구이며 내가 눈에 담게 될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내 발에 닿는 땅의 느낌과 손 끝을 스치는 바람.
머리에 닿는 태양과 밤의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달빛.
이 모든 것들이 아직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지긋지긋했던 현실에서 벗어난다는 후련함과 익숙했던 일상에서 멀어진다는 두려움이 나를 가득 채운다.
조금은 설레고 또 조금은 돌아가고 싶은, 지금은 그런 마음.
그래도 출발은 신나게.
(2012년 4월 네팔 여행 당시 쓴 일기를 바탕으로 쓴 글이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소량의 설렘과 다량의 걱정을 품고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손에 꼭 쥔 아이폰에 음악과 각종 드라마를 꾹꾹 눌러 담고, 책도 세 권이나 챙겼다. 이제 집을 떠나면 리무진을 타고 공항으로 가,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경유지인 태국 공항에 도착한 후에도, 또다시 두 번의 비행을 더 해야 할 터였다. 만반의 준비를 했으니 이동하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겠지.
내키지 않는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여행은 여행이다 보니 버스에 올라 공항으로 가는 내내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함께했다. 사실 안나푸르나라는 아찔한 이름과 등산만 아니라면, 네팔이라는 새로운 나라에서 보내는 3주가 그다지 나쁠 것도 없겠다 싶었다. 나쁠 것 없는 게 아니라, 아주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 어쩌면 이건 자기세뇌일수도 있겠다.
공항.
출발의 설렘과 도착의 안도감, 그리고 사람들의 두근거림으로 가득한 곳. 들뜬 설렘을 안고 엄마, 아빠와 발권 수속을 하러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똑순이 이여사님이 실수라 하기엔 너무 치명적인 일을 저지르셨다. 우리는 네팔 직행 편이 아닌, 태국에서 한 번 경유하는 타이항공을 예약했다. 물론 이유는 비행기 값을 아끼기 위해. 그런데 이 타이항공은 인터넷 예매 시에 지불한 카드를 꼭 발권할 때 가져와야만 한다는 조약이 있다. 그런데 엄마가 네팔에선 현금만 쓰겠다면서 신용카드를 잘 둔다는 것이, 그 카드마저 놓고 오고 만 것이었다. 심지어 엄마는 (2012년 당시) 핸드폰도 폴더폰인데다 공인인증서 따위는 알지도 못했다. 그러니 수습할 길 없이 막막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네팔에 갈 수 있느냐 마느냐 하는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타이항공 사무실과 발권 카운터를 왕복하며 똥줄이 타길 약 한 시간, 출국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가족의 첫 장기 여행 프로젝트가 허무하게 공중으로 날아가고 말 터였다. 마지막 카드를 쓰는 수밖에... 그렇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는... 빌었다. 엄청 빌었다. 손이 발이 되게 빈 다는 것, 애걸복걸한다는 것의 실체를 나는 이날 보았다. 그러다 안되면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하며 거의 진상 가족을 완성해 갈 즈음, 겨우 발권 허락이 떨어졌다. 다시 한 번 타이항공 관계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와 사과의 말씀 전한다.
아직 안나푸르나 그림자도 못 봤는데 벌써 우리는 지쳐버리고 말았다. 잠시 공항 한 켠 벤치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비상으로 챙겨온 간식을 꺼내 들어 지친 몸을 충전시켰다. 땅바닥으로 떨어진 정신과 체력, 당분을 보충한 후에야 겨우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입국 심사대를 무사히 통과! 하-, 이제 정말 출발이다.
안녕, 서울.
잘 다녀올게.
너도 잘 있길.
우리가 탄 비행기는 보기에도 조금 작았다. 하지만 잘 날아가기만 한다면, 사이즈가 중요한가! 비행기에 타자마자 짭조름한 땅콩이 주어졌다. 그리고 곧 기내식이 배급되었다. 그런데 짧은 내 입에 기내식이 맞지 않아서 굶었, 으면 좋았을 것을 빵만 빵만 먹었다. 심지어 엄마와 아빠의 빵까지 뺏어 먹었다. 밥은 안 먹었지만 분명 살은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 몸에 탄수화물과 지방, 당분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사실 이번 여행을 수락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다이어트 때문이었다. 15kg이 갑작스레 불어난 고등학교 이래로, 나는 늘 내 체중에 민감했다. 온갖 다이어트를 섭렵하여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다, 겨우 안정기에 접어든 때였다. 그래도 사람 욕심은 끝이 없어서 조금 더 날씬하고 탱탱한 몸이 탐났다. 그런데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건 누가 봐도 힘든 여정이니 먹어도 살이 빠질 것 아닌가. 등산이 다이어트에 좋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제 나도 완벽한 S라인이 멀지 않았다. 오직 S라인, S라인만이 이 여행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각종 간식과 빵을 잔뜩 섭취했으니 칼로리가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난 이제 곧 안나푸르나를 오를 테니까. 지금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지방 덩어리들은 이후 안나푸르나를 1m, 1m씩 오를 때마다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이다. 아직은 먹어도 괜찮다.
5시간 반이 금방 흘러 어느새 태국 공항에 도착했다.
여기가 첫 고비다. 이제 이 곳에서 9시간을 버텨야만 한다. 잘 곳을 찾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미션이었다. 비행기를 나오면 냉방으로 추울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습한 더위가 느껴졌다. 태국 공항에서 경유를 하려면 비행기에서 내려 east 혹은 west entrance로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린 자리에서 가까운 입구를 빨리 파악하지 못하면, 무려 800m가 넘는 거리를 줄창 걷고 걸어야 한다. 빠른 판단이 다리의 알통을 좌우한다. 잘못하면 엄청 고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얘기다. 제길...
입구를 헤매느라 800m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오고 간 뒤에야 제대로 자리를 찾았다. 우리는 잘 곳을 찾아 떠돌다가 면세점에 도착했다. 태국은 유명한 관광지이므로, 면세점도 어마어마하게 컸다. 엄마와 나는 홀린 듯 면세점으로 들어갔다. 휘황찬란한 쇼윈도 불빛이 두 모녀의 머리에 쏘이자, 잠자리 걱정이 신기하게 사라졌다. 우리는 아빠에게 잠시 구경만 하고 오겠다 했고, 한 시간을 잠시로 느끼는 기적을 체험했다.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며 네팔로 떠나는 여인들의 마음가짐이 너무 세속적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뭘 사지 않더라도 구경만으로도 너무 재밌는 걸 어떡하나. 어차피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인 것을.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잘 곳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때마침 면세점 귀퉁이에 소파가 있기에 몇 개를 옮겨 붙였다. 등을 붙이고 단잠이 들려는 찰나, 엄마가 춥다고 흔들어 깨웠다. 나는 사실 하나도 춥지 않았지만 엄마를 위해 선뜻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 긴 벤치 의자에 누워 다시 달콤한 잠이 들려하는데, 이번에도 다시 엄마가 깨웠다. 불편, 하다고 했다. 나는 그저 아무 데나 좋으니 좀 자고 싶었다. 그러나 짜증을 부리기엔 엄마의 눈빛이 너무나 애절하고 또 맹수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엄마에게 밝게 웃어 보이고, 뒤로는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접이식 의자 겸 침대를 발견했다. 심봤다!! 나는 그 엄청나게 편한 의자 침대에 누워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엄마가 중간에 깨서 보니 숨도 안 쉬는 것처럼 아무 미동도 없었다고 했다. 정말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었다. 푹 자고 일어나 생각해 보니, 2주 앞서 출발한 선영이가 타이 공항에서 이런 침대에 누워 잤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영이는 여기에서 이불 덮고 팩도 붙이고 잤다고 했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이불에 팩까지? 역시 동생이지만 배울 점이 참 많다, 고 새삼 감탄했다. 나는 아직 멀었다.
9시간은 그렇게 다사다난하게 흘렀다. 우리는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그래서 다시 땅콩을 받았다. 잠시 후 기내식을 받았다. 나는 역시 밥은 못 먹고, 빵만 먹었다. 엄마와 아빠 빵도 또 뺏어 먹었다. 음료수도 마시고, 간식도 먹었다. 그렇게 나는 비행기에게 완전한 사육을 당하고 있었다. 아직은 괜찮겠지, 안나푸르나에 오를 테니까. 제길.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우리는 우선 포카라로 넘어가 트래킹을 한 후, 다시 카트만두로 돌아올 예정이다. 포카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우리는 트리뷰반 국제공항이 사각형인지 오각형인지를 살필 새도 없었다. 무엇보다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선영이를 찾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다행히 우리는 이미 서울에서 대사관에 들러 비자를 받아두었다. 트리뷰반 국제공항에서도 비자 발급이 가능하지만 긴 줄을 서지 않고 입국 심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며칠 전 통화해서 선영이가 입국 심사 전에 환전을 먼저 하라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환전을 하러 가려는데, 아빠가 100달러를 주우셨다. 이게 왠 횡재!! 그렇다. 인천 공항에서의 난리는 떠나기 전 액땜이고, 트리뷰반 공항의 행운은 다 잘될 거라는 신의 증표인 것이다. 뭐 그런 제멋대로 해석이 다 있냐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내 맘이니까, 모든 것은 다 내 좋은 쪽으로 생각해버리기로 했다.
기분 좋게 주운 돈까지 포함하여 돈을 환전하러 갔다. 그런데 뭐랄까, 예상과는 달리 우리나라 1960년대 시골 전당포 같은 느낌의 환전소가 떡 하니 있었다. 인천공항의 차가울 정도로 모던한 환전 창구와 직원들에 익숙해져 있던 나였다. 그런데 이곳을 보니, 재밌기도 하고 구수한 느낌이 들어 되려 더 좋았다. 환전 역시 영수증도 따로 없고 여권 검사도 필요 없었다. 그저 돈을 내면 바꿔주니 참으로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우선 900 달러를 환전하여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내 복대에 나눠 넣었다. 복대를 쓰다듬고 있자니 TV에서 보던 한국 전쟁 이후 남대문 시장을 누비던 달러 장수가 된 기분이었다. 서울에서의 내가 아닌 느낌,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사는 체험을 하는 것 같아 괜히 웃음이 났다. 그렇게 나는 신나게 복대를 쓰다듬으며 입국 심사를 하러 갔다. 가족은 함께 입국 심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랑 아빠와 나, 우리 세 명은 전투적으로 함께 입국심사대 앞에 달려갔다. 그런 우리가 너무 저돌적이었던지, 심사대 앞에 앉아 있는 아저씨가 움찔하시는 모습이 티 나게 보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움찔, 하고 삐져나왔다. 먼 길을 돌아 도착한 네팔의 입국 심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분, 우리의 입국 심사는 뒤로 하고 나에게 유독 관심을 보였다. 어디에서 왔느냐, 직업은 뭐냐, 네팔은 처음이냐며 여러 가지 질문을 쏟아내는 통에 도통 입국 심사대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질문만이 아니었다. 다정한 웃음과 과할 만큼의 친절이 쏟아졌다. 심사대 아저씨뿐 아니라 네팔에 도착한 이후 내내 대부분의 남자에게 이런 관심과 친절을 받았다. 그래서 사실 네팔에 있는 내내 나는 미녀 코스프레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웃을 수도 있겠다. 나의 미모를 직접 보지 못했으니 당연한 얘기고, 직접 봤다면 더더욱 믿지 못할 얘기라는 걸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가보지 않은 자는 모른다. 순도 100%의 진심으로, 네팔 귀화를 고민할 만큼 그곳에서 나는 아주 많이 인기가 있었다고!!!
여하튼, 입국 심사대에서 겨우 풀려나 짐을 찾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저 멀리서 폴짝폴짝 뛰는 긴 머리의 한 처자가 눈에 띄었다. 그렇다, 선영이다!!! 선영아!!! 하지만 2주 만에 만난 선영이에게 네팔에 대해 물을 여유도 없었다. 우리는 바로 국내선 비행기 탑승을 위해 뛰어야만 했다. 국내선을 타는 곳까지 선영이가 머물던 숙소의 네팔 총각이 데려다 주기로 했다. 차를 타고 창밖을 보니 구수하기 이를 데 없는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소가 보이고, 소가 싼 똥이 보이고, 나무들이 보이고, 차와 소들이 지나간 자리로 뽀얗게 일어나는 먼지들이 보이고... 열흘 뒤, 우리는 다시 이곳에 돌아올 것이다. 아쉽지만 지금은 이렇게 보는 것으로 카트만두를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