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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제 길

오, 나의 네팔!

셋. 포카라 가는 길.

by hearida

(2012년 4월 네팔 여행 당시 쓴 일기를 바탕으로 쓴 글이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넘어가는 네팔 국내선을 타야 했다. 국내선은 입소문이 난 여러 곳 중 선영이가 물어물어, 가장 괜찮다는 예티 항공을 타기로 했다. 비행기 값 100달러에 수수료가 200루피였다. 드디어 복대에서 첫 인출! 멋지게 루피를 꺼내 돈을 낸 후 비행기 티켓을 받아 들었다. 왠지 버스 터미널이 훨씬 더 자연스러울 법한 공항 터미널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출발한 후 처음으로, 그제야 겨우 한숨 돌릴 틈이 생겼다.

한국에서 영경이가 챙겨준 수제 과자가 생각났다. 지친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특급 간식이었다. 선영이와 함께 먹겠다고 고이 품어온 과자를 엄마, 아빠와 넷이서 나누어 먹었다. 우리 입은 먹으랴 밀린 수다를 떨랴 과부하에 시달렸다. 마지막 과자를 입에 넣고 나서야 비로소, 네팔 여행의 목적이 다이어트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달디단 과자 한 박스를 야무지게 비운 후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며 자신을 자책을 하는데, 저 뒤로 벽에 걸린 안나푸르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나는 안나푸르나에 간다. 하하. 저 안나푸르나의 청명한 바람이 나의 지방을 훨훨 날려줄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살 따위 걱정하지 말아야지. 나는 포장지에 남은 과자 부스러기까지 기분 좋게, 입에 탈탈 털어 넣었다.


얼마 안 있어 비행기 대기석에 들어갔다. 그런데 들어가는 입구가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 입구가 다른 이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신체검사를 하던지 옷을 벗던지, 무언가 남녀칠세부동석 적인 행위가 이루어짐에 틀림없었다. 긴 비행으로 꼬질꼬질해진 나의 추례함이 떠올랐다. 벌써부터 나를 검사할 상대에게 무릎 꿇고 석고대죄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엄마와 아빠, 선영이까지 떨리는 마음으로 줄을 섰다. 아빠는 혼자 남자 줄에 서면서, 무슨 수용소에 끌려가는 전쟁포로에 버금가는 표정을 지어 우리를 웃게 했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문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놀랍게도..!!! 같이 문을 통과한 아빠와 만났다. 바로 만났다. 응? 그러니까... 응? 우리는 따로 줄을 서서 들어가서는, 들어가자마자 하나로 합쳐졌다. 응? 그러니까... 응? 따로 들어가는 이유가 없었다. 물론 우리도 모르는 새 천정이나 벽에 첨단 스캐너가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고 하기엔 매우 얇고 작은 문이었다. 그러니까, 아직은 네팔에 대해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벤치에 앉아 비행기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선영이 말이, 누가 비행기를 타면 설산을 볼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급히 직원에게 다가갔다. 직원은 타서 왼쪽, 그러니까 비행 방향으로 오른쪽에 앉으면 설산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 부풀었다. 설산이라니. 아름다운 안나푸르나 설산을 볼 수 있다니. 절대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우리는 입국 게이트 바로 앞에 우뚝 섰다. 이건 반드시 1등으로 타겠다는, 그리하여 왼쪽에 앉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이었다. 꽤 긴 시간을 그렇게 장승처럼 서서 코끼리처럼 굵은 다리에 붓기가 알차게 더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하늘을 날며 설산을, 눈 덮인 하얀 산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또 얼마나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인지.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 항공사 버스를 타고 비행기 앞까지 이동했다. 예상대로 작디작은 경비행기였다. 좌석이 불과 20여 개 밖에 없었다. 지정 좌석이 아닌 덕분에 엄마와 아빠는 맨 앞자리에, 선영이와 나는 맨 뒤에 탔다. 애초에 비행기가 작으니 기내식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맙게도, 콜라와 땅콩을 건넸다. 오호라~ 쿵쾅대는 마음을 탄산으로 달래는데, 스튜어디스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선물을 건넸다. 그건 바로, 커다란 솜뭉치! 비행기 소음이 너무 크니 귀를 막으라는 거였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이런 유쾌한 비행기는 처음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앞좌석을 살피니 정체불명의 종이 봉지가 보였다. 구토용 봉지였다. 절대 토하지 말아야지. 소중한 기념품이니까. 하하.

서서히 비행이 시작되었다. 선영이와 나는 설산을 보기 위해 머리를 창에 박고 창밖을 바라봤다. 포카라에 가는 30분 내내 뚫어지게 밖만 쳐다보았다. 계속 보니 어린 시절 자주 하던 매직 아이가 타임캡슐을 타고 넘어온 듯 눈에 어른거렸다. 눈이 빠질 듯 아팠지만 설산을 본다면 그것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행 내내 푸르고 푸르디 푸르른 산만 보았을 뿐, 설산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얀색은 기껏해야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정도였다. 대체 누구냐, 설산 볼 수 있다고 한 놈!!


그래, 설산은 올라가서 보지, 뭐.

살아서 도착했으니 됐어.

고마워, 비행기.

고마워, 솜뭉치.

우리의 여행도 솜처럼 보송보송하기를.


LrMobile0101-2016-1152233433954802234.jpeg Pokhara, Nepal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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