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영옥, '애인의 애인에게'
잃을 게 많은 사랑을 한 건 내 쪽이었다. 언제나 더 사랑하는 쪽이 훨씬 더 많이 잃어야 한다.
사랑을 할 때면 나는 언제나 화가 났다.
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약자여야 하는가.
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패자여야 하는가.
왜 사랑은 이토록 불공평한가.
그럼에도,
어째서 나는 이 사랑에 휩쓸리고 마는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생기는 외로움과 사람을 좋아해서 생기는 서러움 중 어느 것이 더 힘든 건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결국,
사랑은 나의 삶에 손을 내민다.
외로움이든 서러움이든 어떤 형태로든 스며든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허망한 노력일까. 어디까지가 욕망이고 어디까지가 집착일까. 욕망이나 미련, 집착이 끝내 사랑일 수 없다면, 사랑 비슷해 보이는 사랑 아닌 것들을 나는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정신없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그 속에,
눈을 뗄 수 없이 천천히 흐르는 외로움이 있다.
화려하지만 쉽게 추락하고
쉴 새 없이 떠들지만 아무것도 가닿지 못하는 곳.
끊임없이 만나지만 지독한 단절이 있으며
모두 모여들지만 아무도 머물 수 없는 곳.
뉴욕.
그곳에 네 사람이 있었다.
정인.
마리.
수영.
그리고 성주.
그들은,
자신은 절대 볼 수 없는 자신의 뒷모습.
바로 그 뒷모습을 내어주고, 또 그 뒷모습을 쫓는 사람들이었다.
뉴욕은
그들이 가장 욕망하는 것을 닮았다.
가장 원하지만 결국 가질 수 없는, 그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동시에 나를 사랑하는 일. 이것보다 더한 기적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또한 그들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 기적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그리하여 사랑(愛)으로 슬픔(哀)을 알게 된 사람들이기도 했다.
낯선 뉴욕에서 길을 잃은 정인.
그런 그녀를 도와준 성주.
'실패한 예술가들'이라는 강의에서 성주와 재회한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철저히 혼자만의 것.
성주에게는 부인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정인은 성주와 그의 부인이 집을 비운 동안 그곳에 머문다.
처음에 그녀는 집에서 성주의 흔적을 찾아 헤매었다.
그가 읽던 책.
그의 사진.
그가 머물던 침대.
그가 만들어낸 먼지까지......
나는 그 누구의 사랑도 이어지지 않는 저녁 속에 앉아 있었다.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서글프지 않았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나 이외의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짝사랑은 선한 인간들이 선택하는 자학이며 자책이니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마음을 끄는 것이 있었다.
성주의 부인 마리.
정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주를 사랑한 여자.
성주와 마리의 집에 머무는 동안,
정인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마리를 위로한다.
뉴욕의 잘 나가는 갤러리스트.
그리고,
1월에 내리는 눈을 첫눈이라 생각하는 여자.
그 여자가 사랑에 빠졌다.
11월의 눈을 첫눈으로 기억하는 남자 성주와.
그것은 이별을 예정에 둔 사랑이었다.
성주는 마리가 필요했다.
아니, 필요했을 것이다.
마리와의 결혼생활을 지속함으로써 생기는 안정된 비자.
그를 뉴욕 예술계로 이끌어줄 마리의 인맥.
집착으로까지 변질될 만큼 강한 마리의 사랑까지......
그러나 성주는 단 한 번도 마리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마리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열정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먼저 태워버린다. 그때의 나는 분명 내가 아는 내가 아니었고, 내가 모르는 가장 낯선 사람이었다.
여자와 남자의 처음은,
서로 다른 욕망이 만들어낸 육체의 탐닉으로 가득했다.
시간이 가면서 그 욕망이 자신의 이빨을 내보이며 제 길을 가려할 때,
갈등은 증폭되었다.
마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변해간다.
그녀는 성주의 사랑을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기에 그를 증오했고,
집착했으며 절망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잊기 위해 더한 육체의 고통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침묵이 한 사람이 선택한 유일한 소통 방식일 때, 그것은 가장 잔인하게 상대를 난자한다.
그러나
그런 마리의 절규에,
성주는 침묵의 칼로 그녀를 베어버린다.
어떤 물음도 외면하고
어떤 요구에도 응하지 않으며
어떤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그녀를 가장 먼 곳으로 밀어내어 승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가장 잘하고, 가장 사랑하고, 가장 절실했던 것이 가장 아프게 나를 배반한다. 가장 가까이 있던 것들이 가장 멀리까지 도망가버린다.
마리는 성주를 가장 잘 알았다.
마리는 성주를 가장 사랑했다.
마리는 성주가 가장 절실했다.
그리고,
성주는 가장 아프게 마리를 배반했다.
그는 마리에게서 가장 멀리까지 도망가버렸다.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한 고통은 가진 것을 잃었을 때의 고통을 한 순간도 넘어설 수 없다.
'실패한 예술가들'의 강의를 맡은 수영.
그녀는 언뜻 성공한 여자인 듯 보인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과 유산의 아픔으로
그녀는 '성공처럼 보이는 실패'를 마음에 새기며 살아간다.
시간이 모든 걸 무디게 할 거란 희망. 자살이라는 유일한 희망이 있으므로 아직은 견딜 만하다고 주먹을 쥔 채 되뇌었다. 절망이나 고통도 내 몸처럼 낡아갈 것이다. 늙고, 병들어, 마침내 죽어버릴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남자, 성주.
수영에게 성주는
'어리석거나 혹은 어린' 남자.
성주를 멀리하면서도 그에게 끌리는 수영의 마음은,
성공처럼 보이는 실패와 실패처럼 보이는 성공의 차이만큼이나
자명하면서도 혼탁한 것이었다.
포토그래퍼.
빛과 어둠 같은 사람.
어둠이 생기는 건 필연적인 빛 때문이다.
예술가로 성공하고 싶지만
돈을 위해 매춘 사이트의 사진을 찍는 남자.
그는 정인의 사랑을 받고
마리와 사랑을 나누었으며
수영을 사랑하고 있다.
성공에 대한 욕망이 가득하지만 그 욕망으로 마리를 잡지 않으며
수영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그 진심을 위해 거짓을 말하는 남자.
많은 것을 쥐고 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
성주.
그가 말했다. 희망 없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다고.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만이 순수한 고통을 주고, 고통만이 예술의 심장을 찌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희망 없이 수영을 사랑했다고 얘기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순수한 고통으로 예술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었는지도.
하지만 결국,
가장 희망 없이 사랑을 하였으며
그로 인한 고통으로 예술의 본질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세 여자.
정인, 마리, 그리고 수영이었다.
짝사랑은 '너는 누구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이지만 그것은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그렇다면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라는 잘못된 질문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소요되는 혼란이 이 적요로운 사랑 앞에선 어느덧 무의미해진다.
성주의 사랑에 매달려 상처받은 마리,
유산으로 잃은 쌍둥이로 인해 아파하는 수영,
모두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라는 잘못된 질문과 마주한다.
하지만,
정인은 성주를 사랑했다.
정인은 성주를 '홀로' 사랑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너는 누구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에 대면한다.
그 질문을 통해 그녀는
성주를 보았다.
그리고
애인(愛人)의 애인(哀人)인 마리와 수영,
그녀들의 슬픔을 보았다.
그리하여 정인은
마리가 뜨다 만 성주의 스웨터를 푼다.
그리고 그것으로
마리의 아픈 심장을 데워줄 스웨터와
수영의 쌍둥이들을 위로할 작은 모자 두 개를 뜬다.
남자 스웨터 = 여자 스웨터 + 아기 모자 둘
결국 정인에게 성주라는 이름은
마리와 수영이라는 두 여자로 기억되는 것이다.
"마리,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주는 일이야."
누군가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준다는 건, 그 사람의 불안을 막아주겠다는 뜻이라는 것 말이다.
물 같은 사람을 사랑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쥐어도 잡히지 않았다.
가두려 해도 가둬지지 않는 사람.
나는 그 사람을 가늠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의심을 낳는다.
의심은 자신을 상처 입히고 사랑을 병들게 한다.
그렇게 모든 것은 썩어서
결국에는 먼지처럼 사라진다.
누군가가 짐작할 수 있는 선 안에 있어 주는 것은 배려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처를 헤아리고
사랑을 지키겠다는 다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주는 잔인하다.
적어도 마리에게는.
그는 마리에게 단 한 번도 예측 가능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가늠할 수 있는 영역에서 항상 비껴갔다.
내 안의 물은 오래전, 그가 전부 마셔버렸다. 그 물은 깊고 깊어서, 나 자신도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한때, 나는 우물 같은 그곳에 빠져 허우적댔다. 하지만 이제 모두 말라버렸다. 황폐해진 그곳에 다시 물이 고이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 것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결국 마리의 우물은 말라버렸다.
'木木'인 성주는
마리의 우물에서 물을 모두 빨아들여
수영이라는 '水'로 흘려보냈다.
내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늘 아프다는 뜻이었다.
수영은 그런 마리를 보았다.
그녀는 마리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한 번 흘러간 물은 다시 마리에게 돌아갈 수 없다.
수영은 알고 있었다.
자신을,
마리를,
정인을,
성주를,
모두의 상처를.
그래서 수영 역시,
아프다.
인간은 각자의 사랑을 할 뿐이다. 나는 나의 사랑을 한다. 그는 그의 사랑을 한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가 나를 사랑할 뿐, 우리 두 사람이 같은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너무나 외로워 내 그림자라도 안고 싶어 졌다.
결국 우리는 똑같이 사랑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 순간 나를 사랑하는
우리가 그 기적 안에 있다 해도
사랑은 늘 각자의 것으로 있을 뿐
같은 것은 없다.
그래서 인간은 외롭다.
결국은 각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각자의 사랑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껴안을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러나,
그럼에도 기적을 꿈꾸는 것은 왜일까.
구름은 사라지고, 비는 그치고, 눈은 잦아들고, 바람은 지나갈 것이다. 그러니까 별이 그곳에 없는 건 아니었다. 별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다만 별은 우리가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이미 그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천천히 흐른다.
별처럼
사랑도 언제나 그곳에 있다.
탐닉, 집착, 이별, 상실, 고독, 오해, 의심......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을 가리고 우리의 눈을 가려도
사랑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다.
애인(愛人)과 애인(哀人) 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