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 도둑

우리,무엇에도 얽매이지 말아요.

- 오쿠다 히데오, '오! 수다' 중에서

by hearida

"휴우, 깊이 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북극곰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천적이 없는 북극의 빙하 위에서 무리를 짓지 않고 혼자서 여유롭게 살고 싶다. 나에게 장점이 있다면 고독과 무료함에 강하다는 것이다. 화려한 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무취미한 게으름뱅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죄의식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다. 여행은 필요 없다.

여행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항해 시대인 19세기까지다. 그 이후에는 불필요한 대중화가 진행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맹렬하게 이곳저곳을 누비며 다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도로만 혼잡해질 뿐이다. 자연만 파괴될 뿐이다. 저 야마모토 나츠히꼬 선생도 말하지 않았나. 여행을 떠난다고 당나귀가 말이 되어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고······. 확실히 명언이라는 생각이다."


- 오쿠다 히데오, '오! 수다' 중에서



이십대까지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사실 절반 이상을 타지에서 보낸터라

부러 여행을 떠날 필요도 없었고요.

워낙 움직이는 걸 게을러하기도 하고 겁도 많거든요.


그런데 삼십대가 시작되자마자

갑자기 이곳저곳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프리랜서라 부르고 백수라 읽는 직업 덕에

딱히 어디 얽매여 있지 않은 게 감사한 일이죠.


어른들이 들으면 혀를 끌끌 차실 일이에요.

한 곳에 정착해서

이제 제대로 어른 노릇을 해야 할 나이에

끈 풀린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니까요.


그런데 다행히,

저에게는 지원군이 있어요.

저를 여행으로 이끈 사람이 바로,

저희 엄마거든요.


엄마 꿈이 세계 여행을 하는 거였어요.

환갑이 가까워 그 꿈을 이루려는 찰나에

하나밖에 없는 딸이 백수니

여행 메이트로는 마침 딱이었죠.


저희 가족은 그래서 일년에 한달쯤은 배낭여행을 해요.

일년동안 번 돈으로

넓은 평수의 집과 좋은 차나 이런 걸 포기하고

아싸, 떠나는거죠.


가서도 레스토랑에 가기 보다는

시장에서 주전부리를 하거나

마트에서 장을 봐서 해먹거나 하고

많이 걷고 많이 보고 무작정 다녀요.


처음에 여행을 떠날 때는

각오가 엄청났거든요.

여행을 다녀오면 이렇게 살겠다라던지,

여행을 마칠 즈음이면 이렇게 변해있겠다라던지.


그런데요.

여행을 갔다와도 뭐, 딱히 변하는 건 없더라고요.

그냥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그래서 인생에 뒤돌아 추억할만한 일을 많이 만든 거요.


하지만 21세기의 종교는 여행이라는 말처럼

요즘은 여행이 자기 성찰을 하는 관문처럼

혹은 대단한 사람이 되는 시험처럼

필수로 해야하는, 그런 과제로 생각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많은 곳을 다녔으니

남들보다 아는 것도 많고

경험도 많다,

그런 오해를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여행을 떠난다고

당나귀가 말이 되는 건 아니고

호박이 수박되는 것도 아니고

제가 다른 사람이 되지도 않아요.


이제와 여행으로

신대륙을 발견할 가능성도 없는 것 같고

인터넷만 있으면 어지간한 건 다 알 수 있는데

굳이 가서 새로운 걸 알 것 같지도 않고요.


그저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세상을 만나는 문이

다른 것 뿐이죠.


누군가는 여행으로

누군가는 책을 통해

누군가는 사람을 만나

누군가는 혼자만의 시간에서


그렇게 성장하고

마음을 넓히고

휴식하고

저마다의 행복을 쌓아가는 것뿐이잖아요.


오늘은 뭐랄까,

이런 이야기가 하고 싶었어요.


세상 시선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여행을 떠나라고 하지만

꼭 여행을 떠나야만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그런 거요.


저마다의 삶의 색이 있는 것처럼

그 삶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고 휴식을 취하는 것 역시

각자 다른 거니까.


우리,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아요.

몸이 아니라,

마음이요.


부디 오늘,

당신의 마음에 시원한 바람이 살랑 불어오기를.

행복의 기운이

가득, 찾아오기를. :)


Lisbon, Portugal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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