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 도둑

하지만 아직은, 꿈꾸는 나비

- 사카키 쓰카사, '화과자의 안' 중에서

by hearida

"그건 그렇고, 에도 시대 사람이 만든 디자인이 지금까지도 사용되다니, 정말 굉장하다. 하지만 나 자신은 죽어서도 뭔가를 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 좀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은 지금이 가을이기 때문일까."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그 시간의 다른 이름을 역사라고 한다. 그렇다면, 언젠가 나 역시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다. 책에는 절대 남지 않을 이름 없는 인생이 되겠지만, 화과자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


- 사카키 쓰카사, '화과자의 안' 중에서



저는 스토리가 촘촘하고 필력이 정말 좋은 작가가

숨 쉴 틈도 안 주고 폭풍처럼 밀어붙이는 소설도 정말 좋아하는데요.

잔잔히 흘러가는 일상을 통해

마음에 스며들듯 번져가는 이야기가 있는 소설을

아주 살짝, 더 좋아합니다.


이 책 '화과자의 안'은 후자에 속하는 소설인데요,

그중에서도 조금 더 특별히 아끼는 책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사카키 쓰카사'의 책은 다 찾아서 읽게 됐는데요.

이름에서 오는 어떤 편견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필명을 쓴다고 해요.

제가 무조건 믿고 읽는 작가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화과자의 안'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진로를 정하지 못한 쿄코가

우연히 백화점 지하의 화과자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화과자의 매력을 알게 되고

함께 일하는 동료와 가게를 드나드는 다양한 손님을 통해 하루하루 성장해가는 이야기예요.

'안'은 '앙꼬(팥소)'에서 유래된 쿄코의 별명이고요.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아서

'안과 청춘'이라는 속편까지 나왔어요.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화과자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깊이 있는 설명,

그리고 각기 독특한 개성과 매력을 지닌 사람들의 약간 미스터리한 이야기까지 있는

참 아기자기하면서도 따뜻한 책이에요.


이 책에서 스무 살 쿄코는 앞으로 뭘 해야 좋을지 막막해하는데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화과자를 보며

자신이 세상에 뭘 남길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저 위에 쓰인 첫 문장처럼

아무래도 자신이 역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거죠.


그렇게 고민하다 얻은 결론이 바로 두 번째 문장이에요.

비록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는 못하더라도

화과자의 맛과 전통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줌으로써

역사의 일부로써 제 몫을 다하고 싶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됩니다.


왜 어렸을 때는

다들 정말 신나게 자기 꿈에 대해 얘기하잖아요.

대통령, 우주비행사, 과학자, 노벨평화상 수상자.......

누구나 원대한 꿈 하나쯤은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커가면서 그 꿈이 자꾸 작아지잖아요.

처음에는 산처럼 크고 높았는데

현실이라는 칼바람에

나무가 쓰러지고 흙이 무너지고 바위가 깎이고

그러다 결국 작은 돌멩이 하나 손에 쥐기도 힘들어집니다.


저는 꿈이 정말 많았어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기도 했고

음반 프로듀서가 되겠다 마음먹은 적도 있고

국제회의에서 일하는 동시통역사가 되려고 한 적도 있고요.

부침개 뒤집듯 꿈이 이랬다 저랬다 했어요.


근데 다 멋있기는 한데, 제 마음에 아주 절박한 꿈은 아니었어요.

그럼 진짜 내가 바라는 건 뭘까, 생각해봐도 선뜻 얘기를 못하겠더라고요.

회사를 관둘 때 내 꿈을 따르겠다고 사람들에게 큰소리치긴 했는데

막상 제가 정말 원하는 걸 모르겠는 거예요.

그렇게 서른 넘어 뒤늦은 사춘기를 겪게 됐죠.


이것저것 기회가 되는 것마다 배워보고

여기저기 갈 수 있는 곳은 다 다녀보고

그렇게 부딪히고 보고 느끼고 깨지다 보니까

어느 순간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알게 됐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오랫동안 해왔던 일.


바로,

글을 쓰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때부터 항상 즐겁던 책 읽기가 고역이 되더라고요.

세상에는 기발한 생각을 하는 창작자도 많고

수려한 문장을 쓰는 작가도 많고

가슴 뭉클하게 만드는 이야기꾼도 많고,

저는 도저히 그런 글을 쓸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또 마음앓이를 했어요.

책을 앞에 두고 질투도 하고 투덜거리기도 하고 짜증도 내고요.

그랬더니 남자 친구가 그러대요.

그냥 너 쓸 수 있는 만큼만 쓰면 되는 거라고, 자꾸 다른 사람이 되려 하지 말라고.

근데 그 말이 참 맞더라고요.


너무 단언하는 것 같지만

아마 제가 노벨문학상이나 맨부커상을 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단호하죠;;)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결코 결코 쉬이 되는 일은 아니고요.

그러기는커녕

하루 반나절도 못가 사람들에게 제 글이 잊힐지도 몰라요.


그래도 제 할 일은

묵묵히 제가 쓸 수 있는 만큼의 글을 쓰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글을 쓰는 즐거움과 책이 주는 기쁨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

이름은 남지 않더라도 역사의 일부로서 온 힘을 다해 매일을 살아가는 것, 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꿈은 원대하게 가져 보려고요.

꿈꾸던 나비가 한껏 웅크려 있다가 날개를 힘껏 펄럭이는 순간

지구 반대편에서 거대한 폭풍우가 내리는 것처럼

제 작은 움직임이 어쩌면 큰 결과를 낼지도 모르니까요.

그건 긴 시간을 두고 오래오래 지켜봐야 알겠죠.


하지만 아직은,

꿈꾸는 나비.

그래도 꿈이 있어 행복한 나비입니다.

오늘도 살랑살랑 기분 좋은 가을바람을 타고

훨훨 나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다들 즐거운 한가위 보내고 계신가요?

부디 소중한 사람들과

기분 좋은 이야기들로 마음 풍성해지는

따뜻한 하루 보내시길.

행복하세요, 담뿍. :)



Okinawa, Japan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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